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통 Aug 24. 2021

밥 말고 먹을 수 있는 것들

밥 외 먹어야 할 것들… 추억 · 아픔 · 꿈 · 자존감 그리고 여행

밥을 실컷 먹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진 사람이 아주 작은 찻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던 시절이 있었다. 적은 양으로 배를 더 불리기 위한 고역의 행위였다. 라면의 양을 키우기 위해서 면을 불리기도 했다. 너무나 고픈 배를 채우려 물을 마셨고, 상대방을 위해 안 먹은 밥을 먹었다면서 하얀 거짓말도 했다.


2016년 12월 개봉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봉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고 호평을 받았다. 그 해 칸 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찬사만큼 울림이 컸던 인생 영화였다.



평생 목수로서 성실히 살아가던 주인공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니엘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은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나 도움을 주게 된다. 둘이는 서로 의지한다.

케이티의 형편은 곤궁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다니엘과 두 아이들에게 파스타 한 접시라도 먹이기 위해 자신은 이미 먹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서 자신은 과일이면 된다며 사과를 베어 물고는 메마른 눈빛을 허공에 바친다.

케이티는 희망을 잃고 주저앉아 울고 만다. 다니엘은 그녀를 다독인다. 다니엘의 한 마디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배가 고픈 상황에서 먹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지독히도 비참한 현실에서도 사람은 먹어야 한다. 무능력과 잘못이 개인의 것이라고 해도 “먹어야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며 가슴 울리는 다짐을 할 수 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한테 최고의 욕망은 식욕이다. 식욕마저 가난해지면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권력층의 1차적인 지배력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의 수명이 75세라고 가정했을 때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먹을까?

주식인 쌀은 83가마니를 먹는다고 한다. 물은 35톤을 넘게 마신다. 우유는 1리터짜리 팩으로 3,400개다. 소는 1마리, 돼지는 18마리, 닭은 491마리 수준이다. 과일은 4톤, 채소는 7톤 규모다. 한 평생 사람이 먹고 마시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라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는 데에 맛을 들이지 말라고 한다. 음식 작가면서 《포크를 생각하다》의 저자 비 윌슨이 쓴 《식습관의 인문학(원제: First Bite)》에는 ‘식습관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명제가 곳곳에 배여 있다.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잡식동물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또 다른 결과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먹는 법은 숨쉬기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먹는 법은 학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 아기에게 음식을 먹이는 부모는 음식에서 어떤 맛을 느끼도록 훈련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양식(糧食) 말고 사람들이 섭취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측정하기 어려운 명제이다. 하지만 학습을 통해 먹는 법을 익히듯이 양식 외 것들을 먹는 식습관의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먼저 우리는 추억을 먹어야 한다. 언제든 필요할 때면 행복한 추억을 꺼낼 수 있도록. 추억은 삶을 지탱해준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연결해주고, 아름다움과 위안을 선물한다. 추억을 먹음으로써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지켜낼 수 없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간직한 행복을 꺼낼 수 있다. 자신한테 추억을 기부하면 추후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다. 이 정도면 추억의 미학이다. 추억을 먹어 내 몸 안에 조금의 여백도 없다면 필요할 때 끄집어내서 되새김질할 행복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또 우리는 아픔을 먹어야 한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골목에는 특별한 박물관이 있다. 바로 실연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실연한 사람들이 사랑했던 연인과 함께 했던 물건들을 이별을 기념해 기부하고, 그 러브스토리와 함께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실연과 이별의 고통은 복수의 칼을 갈 만큼 작지 않다. 그런 고통과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고통스러운 이별에는 행복한 순간이 들어 있다. 그래서 아픔을 먹어야 사랑이 완성된다. 생로병사의 인생처럼 사랑과 관계의 인연도 끝이 있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비탄에 젖기보다 황홀을 찾아낼 수 있는 법, 아파봐야 알 수 있다.



우리는 꿈을 먹어야 한다. 삶의 지혜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마치 물고기가 헤엄칠 때 쉴 새 없이 작동하는 지느러미처럼, 물 위를 유영하는 오리의 쉴 틈 없는 물 속 발놀림처럼, 우리한테 보이지 않으나 전진의 힘이 있는 지혜를 찾아 나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이 필요하다. 삶을 살아가는데 두려움 없는 신뢰와 비법은 바로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어떤 꿈도 우리의 본능적 욕망이나 소망의 작동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결국 꿈은 과거와 현재의 실제 경험, 본능적 욕망이나 소망, 그리고 희망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소망하는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꾸는 꿈과 희망이 우리를 긍정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우리는 자존감을 먹어야 한다. 없는 자존감은 회복하고, 있는 자존감은 성장시켜야 한다. 자존감 회복은 자신의 인생을 적극 개척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자신의 본성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때로 힘들고 지쳐 고단할지라도, 성품은 항상 크고 밝고 건강해야 한다. 자신을 진심으로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촉박함에서 해탈할 수 있다.


아주 가끔 외로움도 먹어 보자. 정호승 시인은 시 <수선화에게>에서 이렇게 읊었다.

울지라마/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외로워져야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삶은 곧 외로움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복작거림 속을 벗어나면 바로 우리는 헛헛해진다. 세상이 깊어질수록 우리 사회는 헛헛해지는 시간을 많이 생산해낸다. 외로움이 한도 초과돼 공허함으로 치닫기 전에 힘을 키워야 한다. 외로움이 그윽하고 감미롭고 고혹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여행을 먹어야 한다. 미친 듯 달려왔던 어제를 돌아볼 수 있다. 앞만 보고 뒤를 볼 수 없었던, 그 열정이 식기 전에 다시 데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더 이상 솟아오르지 못한 에너지를 들끓게 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멋진 상상력 발전소를 한 곳 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생의 궤적을 바꿔 놓을 것이다. 성취와 과욕의 중독을 치료해 줄 것이다. 여행은 술 취한 듯 속이 쓰린 나에게 숙취해소용 해장국이 될 것이다. 피폐함으로 가득 찬 정신을 해독시켜 줄 디톡신이 되어 줄 것이다.


과식(過食)의 덕후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아픔과 추억과 꿈과 희망을 먹는 ‘성(공한)덕(후)’이 되어 보자. 무모한 돈키호테처럼. 대신 이제는 먹어서 성공하자. “이룰 수 없는 꿈을 먹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먹고, 이길 수 없는 적을 먹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먹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따서 먹자.”

작가의 이전글 겸손을 감시하는 절, 대흥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