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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Aug 18. 2021

겸손을 감시하는 절, 대흥사

심신수양과 험하게 다뤄진 마음을 수련하는, 소멸하지 않는 별과 같은 곳

  해남 사랑은 퇴로가 없다. 법정 스님을 향한 사랑 역시 도저히 막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난 곳이, 법정 스님의 고향이 해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해남이 엄마의 품 같은 느낌에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 

해남 땅끝 마을의 미황사가 엄마와 같다면 대흥사는 아버지와 같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다. 그는 갓난아기였던 나를 두고 일몰의 행차를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 발걸음이 닳고 잊혀진 채 어언 60년이 다 됐다. 어찌 해남이, 대흥사가, 족적의 흔적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대흥사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름은 사정없이 덥다. 가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의 숨바꼭질이 한참 동안 이어지길 바랬다. 하지만 어느새 태양은 구름을 몰아내고 레이저 쏘듯이 아래로 내리꽂는다. 나는 태양의 빛으로 샤워를 한다. 솟구치는 땀이 분수 같다.


파란 하늘 마저 덥다. 대흥사의 여름은 솟구치는 분수처럼 땀을 뽑아낸다.



  대흥사는 양쪽에 연식이 오래된 나무로 푸른 벽처럼 둘러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그늘진 공간일지라도 여름의 바람은 온몸을 땀으로 범벅지게 만든다. 길고 긴 길을 따라 옆쪽에서 아우성 치는 소리 역시 길게 이어졌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옆은 한 여름날 중생들에게는 천국같은 계곡이 있다. 계곡물에 몸을 맡긴 남녀노소의 아우성은 번뇌의 깨달음에 다다른 느낌일 것이다. 절에는 관심이 없는 여름 성수객들에게 계곡은 절 보다 더 평안한 곳이 됐다.

  대흥사는 쉽게 몸을 내놓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를 마다한 계곡 속 알몸들은 그저 보살처럼 너그럽게 보일 뿐이다. 걸어도 걸어도 대흥사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걸어갔던 길의 운치가 없었다면 대흥사의 시작은 크게(大) 흥(興)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대흥사는 이 삼십 분에 걸친 고행의 걸음 끝에 비로소 절의 발끝이라도 만질 수 있었다.


숲깊을 한참 걸어가야 비로소 대흥사의 발끝을 만질 수 있다.



  대흥사는 두륜산 산자락에 있다. 오래전 기억이 아직도 새벽처럼 남아있다. 스님 한 분이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먼 산을 가르켰다. “두륜산의 봉우리들을 잘 보세요. 어떻게 보이나요?” 한참을 쳐다봤다. 도무지 무언가를 답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스님은 “잘 보시라!”고 하시면서 갈 길을 가셨다. 

  결국 나는 해탈문에서 두륜산을 바라보면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을 성찰 후에야 알아냈다. 바로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형상이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았다.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은 주먹 쥔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쥔 모습이다. 이를 두륜산에 대입해 보면 가장 오른쪽의 두륜봉(629.3m)이 부처의 머리이고, 가련봉(703m)은 오른 손, 노승봉(688m)은 검지를 든 왼손이다. 더 왼쪽의 고계봉(638m)은 발이다.’ 



보는대로 보인다는 말처럼 성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안락정토에 도달하려는 발걸음이 평생 멈춰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의 눈과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어도 진짜 부처의 형상이 맞다. 어쩌면 나의 불심일지 모른다. 먼 곳에서 장엄하게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을 알고나서야 나는 비로소 ‘영원토록 평안한 곳을 이루는 것은 마음이구나!’를 깨달았다.

  보는대로 보인다는 말. 일출 때보다 일몰의 해가 슬퍼 보인다는 것과 같음이리라. 걸어왔던 발걸음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같이 생각 않다가 한해가 마무리는 될 때쯤 돼서야 돌아보는 것처럼, 인생사 어리석음을 보는 것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불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안락정토에 도달하려는 발걸음이 평생 멈춰있을 수도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산 위에 누워 있는 부처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어디서 왔느냐? 삶이 무어이더냐?”

“저는 과거로부터 왔고, 삶은 무게이더이다.”

“어떻게 버리고, 무슨 수로 완성하겠느냐, 너의 인생을 말이다.”

“주름살의 깊이에 발이 빠질 수 있다는 경계심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삶을 지탱하는 두 발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주름살의 골도 깊지 않을터이니 말입니다.”

“인생은 서성거리면 훌쩍 지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으로 삶을 지탱하면 별처럼 한 순간 소멸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시골버스가 천리길을 달려가듯 쉬엄쉬엄 뒤뚱뒤뚱 거려도 간명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감은 눈을 떴다. 앞쪽에 천불전이 나타났다. 천불전은 그저 놀라웠다. 감동스럽다고도 해야할만큼 마음에서 어둠을 거둬냈다. 천불전 법당에는 천 개의 옥돌불상으로 꽉 차 있다. 어른 주먹만한 불상의 표정은 무려 천 가지다. 천 개의 불상이 천 개의 표정을 가진 것이다.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넋을 잃고 합장을 얻었다. 시간이 꽤 흘러갔다. 어느 순간 천 개의 불상의 목탁처럼 명징의 소리가 났다. 생명을 깨우는듯한 소리였다. 마음의 활기가 느껴졌다. 천불전을 나오고, 대흥사를 떠나고 나서야,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천불전의 사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천불전에서의 머무름은 그만큼 강제 없는 수행의 순간이었다.



천불전 법당에는 천 개의 옥돌불상으로 꽉 차 있다. 어른 주먹만한 불상의 표정은 무려 천 가지다. (사진: 대흥사 홈페이지)



  대흥사의 공간은 고급진 궁궐 만큼 넓고 크다. 신라시대 때 창건한 대흥사는 조선조 때 전국적인 명찰로 이름을 알렸다. 서산대사는 대흥사를 이렇게 평했다.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이라고.

  뜨거운 햇빛에 몸을 드러낸 대웅보전은 장엄했다. 예불의 영험함이 남달라 보일 만큼 빛을 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중생들의 삶의 고민을 청정한 도량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웅보전’의 글씨는 조선 당대 명필 이광사가 썼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귀양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새로 써준 글씨로 걸게 했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린 추사는 자신의 것을 내리고 이광사의 것을 다시 걸게 했다고 한다. 겸손을 공양하기 위함이리라. 대흥사의 ‘무량수각’ 편액은 김정희가 쓴 것이다.


뜨거운 햇빛에 몸을 드러낸 대웅보전은 장엄했다. ‘대웅보전’의 글씨는 조선 당대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흥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두륜산의 천년수가 참선의 욕심을 만들어 주고, 자연과의 대화를 열게 했다.

  초의선사의 소박한 삶이 묻어 있는 암자와 정원은 일상을 내려놓고 쉬었다 가기 좋다. 중생들의 쉴 곳은 그저 풀밭 만이라도 좋다. 심신수양과 험하게 다뤄진 마음을 수련하는, 소멸하지 않는 별과 같은 곳이 바로 대흥사다.


심신수양과 험하게 다뤄진 마음을 수련하는, 소멸하지 않는 별과 같은 곳이 바로 대흥사다.



  대흥사는 개천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 별원의 등 3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이 있다.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강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별원의에는 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등이 있다.

  태양을 빨아들이는 깔때기 속 같은 여름. 겸손함을 감시하는 절, 대흥사. 하루 반나절 만 함께 하기에는 아직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이상하다. 자주 절에 가게 된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심리의 정화가 필요할 시기이기 때문이리라. 올해 초 엄마를 떠나보내고 여러 절을 찾았다. 슬픔 만이 현재 갖고 있는 감정이라고 느꼈던 내 삶이 중심을 잡혀가고 있다.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답을 찾아야 할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단정히 잡도록 해주는 곳이 절이요, 비로소 그 절에서 흩어진 마음을 모을 수 있다. 분명히 그렇다. 머무는 곳이 있고, 머물고 싶은 곳이 있다. 머무는 곳과 머물고 싶은 곳을 나눌 수 없는 곳이 대흥사다. 대흥사는 그런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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