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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Sep 15. 2021

내려 놓고 내려 놓으면 내려 놓아진다

내려 놓으면 웃음이 보이고 통찰이 보이고 우리 삶에서 감동을 볼 수 있어

프랑스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을 소재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는 막스 피카르트의 글 한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엄격한 침묵과 금욕 생활을 추구하는 곳이다. 1984년 촬영 제의를 받았으나 수도원은 시기상조라며 거절했다. 그 후 15년 뒤인 1999년 허가가 나왔고, 2002년부터 2년간 촬영했다고 한다. 촬영 당시 수도원은 조건을 내걸었다. 조명 금지, 인공 음향 금지, 해설과 논평 금지, 스텝 없이 혼자만 촬영할 것. 필립 그로닝 감독은 수도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수도원의 삶을 표현했다. 침묵이 주는 여유와 아름다움이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 세상은 절제되지 않은 소음으로 몹시 시끄럽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없다. 주위와 주변인에 의해서 그 위대한 침묵 같은 여유와 환희는 누릴 수 없게 됐다. 관계되지 않은 남들로 인해 침묵이 깨지고 있다.


대중 교통 속, 휴대전화 통화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침묵을 깨게 한다. 클라이막스의 대순간, 잔잔한 고요와 적막에 압도된 극장 안에서 어떤 관객의 잘 튀겨진 팝콘 씹는 소리가 우리를 깨운다. 침묵할 수 없는 곤혹스러움은 이렇게 늘 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에서 가끔 침묵은 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위대한 침묵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사람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독일의 여성 커뮤니케이션 학자 노엘레 노이만(Elisabeth Neolle-Numann)은 ‘침묵의 나선이론’을 주장했다. 자신의 생각이 다수의 의견과 일치하면 자신있게 의사표현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리로부터의 고립이 두려워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한계는 침묵을 통하여 그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고자 함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가정이나 조직에서 ‘나’로 인해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강해 조직 구성원이나 가족들한테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강제된 침묵은 창의성을 잠재우고, 아이디어를 싹트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조직의 기운이 활달해지려면 많은 의견이 언어로서 표현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의 시작이다. 


계절에 내리는 빗 소리를 들으면 감정의 기능이 움직인다. 비(雨)에 대한 감성적 표현을 하고 싶어진다. 아니면 노래라도 흥얼거리게 된다. ‘봄~비 내리는 영동교를….’ 비와 자신이 서로 연결돼 소통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소통의 연결고리가 많아진다면 조직 안에서, 가정 안에서 기운이 샘솟게 된다.


가끔 침묵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사한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위대한 침묵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종일 일하는 곳에서, 또 가정에서는 침묵 보다 언어의 소통으로 위대한 성과가 만들어진다. 침묵이 금(金)인 조직에서는, 산 속의 절과 같은 집에서는 사람의 숨 소리 외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침묵은 그 가정과 조직을 묵묵히 가라 앉힌다. 자신은 침묵을 만드는 사람인가 소통의 고리를 만드는 사람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침묵이 멋져 보였던 아날로그적 세상은 디지털 문화의 파도에 휩쓸려 간지 오래다. 침묵하지 않는 자만이 빵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힘과 지위에 의해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소통은 바로 산소이다. 나는 지금 침묵의 긍정적 변화를 외치고 있다.


법정 스님이 말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침묵을 강권하는 어리석음 보다 소통으로 헌신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을 어떨까.


나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39개까지 만들어 놓고 진척이 없다. 쉽지 않더라. 하지만 리스트의 첫번째와 두 번째는 자신 있게 적었다. ‘긍정적 침묵하기’와 ‘내려놓기’가 그것이다. 앞서 이야기처럼 나로 인해 주변인들이 침묵을 당하지 않는지, 나의 침묵이 주변을 답답하게 하고 있지 않는지. 심사숙고한 침묵과 절제된 침묵으로 주변의 비타민 같은, 금(金)의 침묵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내려놓기.’ 지금의 생과 다음의 생에 까지 가더라도 쉽게 결심할 수 없는 ‘내려놓음’이다. 이 내려놓기를 자신 있게 버킷 리스트의 상위에 자리잡아 놓았다. 중국 고전 철학사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인 장자(莊子)는 “하는 것은 없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도 없다(無爲而無不爲)”고 주장했다. 장자는 ‘내려 놓으라’고 강조했다. 내려 놓아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움켜쥐는 삶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더 많이 가지려, 더 많이 사랑 받으려, 더 많이 나아가려…. 그야말로 열정의 과잉이었다. “괜찮다, 뭐가 문제야!” 라고 말해주는 여유는 내려놓고 난 다음에서야 가능하다. “얼마쯤 왔니?” 라는 물음 보다 “이 만큼이나 왔네!”라고 트집잡지 않는 삶이 바로 내려놓기이다. ‘악연’도 ‘인연’으로 변화시켜 마음의 중심으로 끌어 안는 것 역시 내려놓기이다.


영화 버킷 리스트는 우연히 같은 병실에 있게 된 자동차 정비사와 재벌 사업가가 ‘나는 누구인가’를 정리하면서 하고 싶던 일을 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다이빙하기 등의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 리스트에서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를 쏙 빼와 내 리스트에 추가했다.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기쁨과 삶의 의미라는 것. 그것은 크게 본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내려 놓고 작게 보면 훨씬 잘 보인다. 멀리가 아니라 바로 눈 앞에서 말이다. 내려 놓으면 웃음이 보이고, 통찰이 보이고, 삶에서 감동을 볼 수 있다. 내려 놓고 내려 놓으면 내려 놓아진다. 자작시 ‘희망’을 함께 하면서 ‘내려놓음’의 동지를 찾아야겠다.


온 세상을 보는 눈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오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은 아닐지라도

희망을 꿈꾸는 가능성이 내게 있다면

쓰라린 고통은 아니지만

미세한 아픔으로 성숙의 의미를 알게 해 준다면

큰 웃음을 따라가지 못해도

잔잔한 미소로 얼굴을 밝힐 수 있다면

세상 걱정이 앞 길을 막아서도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다면

세상사는 그게 녹록치 않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항상 간직할 수 있다면

 나이 듦이 거추장이 아니라 완숙함으로 번지게 하고

아침에 일어남이 고통이 아니라 미소를 띄우게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에 떨게 하고

돈 벌이는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람을 느끼게 하고

타인의 목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노래가락으로 들리게 하고

남의 성공에는 시기가 아니라 축하로 박수치게 하고

인생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만들어가게 하고

울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기뻐서 터져 나오게 하고

웃음은 코미디를 봐서가 아니라 삶이 즐거워 나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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