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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Sep 17. 2021

백양사, 머리 위로 꽃비가 내린다

고불매의 꽃비가 머리 위로 뿌져지는 날이 올 때 까지 합장을 풀지 않으리

양은 순하고 귀엽다. 한자의 양(羊)은 상서롭다는 의미가 있다. 무리를 지어 살아 평화와 화합의 동물로 통한다.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白羊寺)에 ‘양’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됐다. 백양사는 이처럼 순한 양처럼 다가왔다. 하얀 털이 수북한 양처럼, 마치 나를 감싸주는 것처럼, 뽀송뽀송한 절이었다.



백양사에 가까이 가려고 시공(時空)과 이별하듯 길을 걸어 올라가면 사대천왕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대웅전과 극락보전, 우화루를 만날 수 있다. 극락보전의 기품있는 모습은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답게 영혼이 들어있는 흑백사진처럼 다가 온다.



먼저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대웅전의 침묵이 이채로웠다. 뒤쪽에 백암산 백학봉의 위세에도 힘을 뺏기지 않고 깨달음을 위해 오롯이 정진하는 자세였다.    

 

‘꽃비가 내리는 전각’이라는 뜻을 지닌 우화루(雨花樓). 그 우화루 옆 담벽에 고불매가 자리잡고 있다. 우화루는 절의 이름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1574년 환양선사는 약사암에서 늘 불경을 외웠다. 그 소리를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과 스님은 물론 산짐승까지 몰려들었다.


어느날 흰 양이 환양선사의 꿈에 나타났다. 양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인간의 몸으로 환생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 백양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화다. 백제 무왕 33년(632년) 여환은 백암산 백암사를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중연선사가 정토사, 조선 선조 7년 환영선사에 의해 백양사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백양사의 고불매는 천연기념물 제486호인데, 수령이 약 350년이다. 강릉 오죽헌 율곡매(484호), 구례 화엄사 들매화(485호), 순천 선암사 선암매(488호)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매화로 불린다. 천연기념물 매화 가운데 유일한 홍매화다.      


나는 8월의 방문이라 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눈에는 눈에는 붉은 매화가 가득 찼다. 이내 마음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번뇌가 붉어지고, 슬픔은 환해지고, 결국 내 몸이 붉어졌다. 사방으로 뻗어진 가지는 마치 늙은 엄마의 손처럼 갈라지고 매달랐다. 온갖 시련을 잘도 버텨온 엄마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연이란 고목과 비교해도 예외가 없다. 이별이 아니라 바로 다시 만남이라는 것이….



사람은 자연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시간으로부터 지배받는 이치와 같다. 시계 바늘처럼 수도 없이 돌아가는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파란 하늘은 신성했다. 신성함은 절이 갖고있는 보이지 않는 질서다.     

 


잘 지켜진 인간사회의 질서를 인정(人情)으로 갈음하는 것, 그것은 믿음으로 싹틔운다. 백양사는 칠성전이 있다. 옛날에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북두칠성은 신이었다. 그래서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기도했다. 건강과 장수를 위한 공을 드린 것이다. 실제 확인할 수 없지만, 칠성전에서 기도를 하면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오래될 사찰 마당의 흙마저 곰삭은 느낌이다. 그래서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백양사에는 눈여겨 볼 나무들이 많다. 보리수나무와 갈참나무, 비자나무까지.

     


백양사의 감동은 쌍계루와 백학봉의 조화로운 콜래보이다. 하얀 바위의 암봉이 은빛 사이키 조명처럼 절 지붕의 기와들에게 쏟아진다. 옛시인들은 백암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쌍계루는 고려 충절인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발자취를 품고 있다. 말년에 백양사에 왔다가 주지 스님의 요청으로 쌍계루에 앉아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그 마음을 시로 옮겼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간 뒤 죽임을 당했다. 포은의 스승이었던 이색은 쌍계루라는 당호를 직접 지어줬다. 후세 사람들은 포은과 목은의 넋이 서린 곳이 쌍계루라고 기억했다.   


  

백학봉을 품은 쌍계루의 운치, 고불매의 찬란한 개화, 내게 남은 여행의 숙제 리스트에 올린다. 자연은 묵은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옛것의 품격은 신성을 넘어 신령스럽다.


      

백양사의 주지 무공스님이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이랬다.

“새벽예불 올리고, 풀도 매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 한 판 벌여봅니다. 자신 만의 삶을 온전히 살아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그려가야 합니다. 방거사의 임종게를 음미해 볼만합니다. ‘있는 모든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 세상 잘 살라./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  

   


세상살이의 속도가 가끔 풀어질 때, 시간의 흐름에 그저 내 몸만 내던졌다 싶을 때, 결코 삶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한테 몰아치게 해본다. 그러면 살짝 긴장이 되면서 인생 길의 난관에 유비무환적 대책을 세워놓게 된다. 싱거운 음식이 몸에는 좋다지만 맛은 없는 법이다. 묵직한 죽비한테 몸을 내맡겨 보면 괄약근 조이듯이 바짝 긴장하게 되는 법이다.  


    

목탁에  몸을 부딪치는 느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희노애락의 감정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백양사 고불매의 꽃비가 나의 머리 위로 뿌져지는 날이   까지 고이 모은 합장풀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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