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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Jan 11. 2022

딜리트(delete)와 카피(copy)

삭제할 건 삭제하고 복사할 건 복사하고... 삶은 딜리트와 카피의 반복

다시 한 해를 맞이했다. 희망찬 새해를 맞으라는, 정 깊은 덕담들이 오간다. 지난해 그믐밤 어김없이 울렸던 보신각 종소리에 얹혀 한 해와 안녕을 고하면서, 새해 소망을 빌고 각오를 다짐했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얇고 짧게만 동거했던 새해 신념들, 벌써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현실을 맞이해서야 되겠는가.


새해, 희망이 보인다. 새로운 해여서 일까. 햇살마저 따스하다. 벌거벗은 나무 위에도, 새롭게 하루하루를 살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서울역 지하도에 자리한 노숙자의 종이박스 하우스에도, 메마른 남산의 정상에도 새해의 희망이 흐른다. 출근 길, 아파트 조경수 위에서 들려오는 까치의 외침이 더욱 희망차다.


정호승 시인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를 다시 읽었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러/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인은, 자신은 인생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해주었으나 인생은 자신을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삭풍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다. 인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고 생각되자 인생에 대해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 이 시를 쓰게 되었다.


새해가 그렇다. 지난해에는 뭔가 해 낸 것도, 자신한테 뭔가 해준 것도 없다고 느끼면서 새해를 열곤 한다. 그래서 새해에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열정의 태동을 강하게 느낀다. 새해의 모든 것들은 다시 태어나 가슴에 열정과 소망을 달고 웃고 있다. 새로운 힘이 솟는 모습들이다. 어느 새 두 손을 모으고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새해 아침 햇살이 가려지지 않고 비춰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시점은 모든 것들이 하얗다. 색칠하기 전 도화지 색깔처럼. 그래서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마음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마련이다. 언제나 같은 새날이 주어지지만, 유난히 연말연시 시기가 되면 보통의 일상의 아닌 ‘감성’이라는 맥락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이어지고, 또 오늘과 같은 내일일지라도 유난히 이 시기에는 어떻게 걸어 ‘왔는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에 몰입한다.


뭐라 해도 결국 삶의 물줄기는 한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 의도적으로 물의 방향을 틀지 않으면 물줄기는 한 쪽으로만 흐른다. 흐르다가 고이기도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마음의 샘을 파 보는 것이다. 맑고 투명한 물이 가득히 고이게끔. 그 시원한 물줄기로 과거의 일상을 씻어내는 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새롭게 변신해보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야 할 시기다. 지금이 바로. 다양한 맛의 삶을 살아보는 사람이 마침내 행복한 법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 시점이 되면 매번 떠오르는 단어 두 개가 있다. 바로 딜리트(delete)와 카피(copy)다. 사전의 해석은 이렇다. 딜리트는 ‘삭제’하는 것이고, 카피는 ‘복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인생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싶다던가, 또 어떤 때는 그때의 일을 그대로 다시 복사하고 싶은 것 말이다. 특히 문서 작업 중 저장을 잘못 해서 내용 전체가 없어졌을 때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대단히 짜증나는 일이다. 이때 카피라는 용어가 의미 있게 되살아났을 것이다.


인생이 딱 그렇다. 딜리트 키를 마구 누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컨트롤 브이(V) 키를 누르고, 다시 컨트롤 시(C)키를 불러서 카피를 하고 싶을 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 했다.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에서 딜리트 횟수를 줄이고 카피의 기회를 많이 생산하는 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12월에는 자신을 돌아본다. 나를 돌아보는 일은 나의 허물을 보는 것처럼 유난히 도드라진다. 


'새벽 창가에 서서/ 내 허물을 되짚어 보네/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그만 눈을 감고 마네/'. 이순희 시 <자화상>이다. 지난날의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의 허물이, 그저 시처럼 세 가지라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 이상이다. 눈을 감고 만다는 것은 곧 허물을 헤아리다 부끄럽고 참회의 의미일 것이다.


법구경 이 세상 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전에는 어리석음 속에 살았어도 지금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어쩌다 악한 짓을 했더라도 선행으로 악행을 덮어버린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사람은 누구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세상을 다시 비출 수 있다. 자기를 바로 볼 때 후회는 반복되지 않는 법이요 자신을 정확히 알 때 존재의 실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회복할 수 있는 법이다. 


과거의 딜리트는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연말연시는 끝과 시작이 만나는 점들의 빛과 같다. 그 빛이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사그라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전환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행복카피소(所)가 있다고 치자. 그곳에 다양한 행복의 원본들을 잔뜩 보관해두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 필요할 때마다, 또 행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복사해 주는 것. 얼마나 행복의 향기가 솔솔 나는 카피인가.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 중 <생활의 달인>을 가끔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달인으로 변한 모습과 활약은 그야말로 명장(明匠)이 부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을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터라 이보다 나은 게 없다는 생각이다. 힘들고 거친 일상의 삶 속에서 정직하게 한 우물을 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다. 바로 성실과 근면의 본보기를 카피하고 싶은 생활의 현장이다.


우리, 새해에는 하루하루를 여행하듯이 생활해보자. 날짜의 숫자는 비행기 출발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오늘도 출발, 내일도 출발, 우리는 매일 여행을 떠난다. 시간 속으로 여행이요 자기한테로 여행이다. 여행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세상을 여행하듯이 체험하면서 얻는 지식을 통해 인생의 고비를 넘겨보고, 여행하며 느끼는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기쁨을 만들어보자. 


여행하는 사람들의 표정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얼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언제나 여행은 행복하면서 보람으로 찾아온다. 여행을 통해 성숙해진 자신을 칭찬하면 기대와 희망의 문이 열리게 된다. 2022년 열 두달 삼백예순날의 여행, 그 끝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올 한 해의 여행이 진정 행복했노라고.” 


인생의 딜리트와 카피. 그것의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은 자신이다.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복사할 것은 복사하고. 우리네 삶은 딜리트와 카피의 반복으로 여물어간다. 이는 곧 달인이 되어 가고, 명품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나’라는 브랜드를 명품으로 만들어보자. 명품을 소유하려고 애쓰는 열정으로 아예 자신을 명품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다. 딜리트로 가위질하고 카피로 재단한 명품의 인생을 만드는 자신이 바로 달인이다. 2022년 새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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