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은 ‘덕분에’ 살아간다. ‘덕분에’는 원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오래전 일이다. 퇴근 길이었다. 갑자기 나에 대하여 생각했다. 이런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대답은 '응!'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홍보팀장을 맡고 있었다. 연봉도 낮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 둘의 긍정적 효과가 로또에 버금갔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박사 과정 중에 있는 것도 남다른 자존감이었다. 어디 내놔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행복의 기운이 자꾸 커지는 것만 같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마치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다.
도로 한복판에서 접촉사고가 났다. 생각의 몰입, 그것도 행복한 사고(思考)의 순간에 일어난 사고(事故)였다. 사고의 해결은 순조롭지 않았다. 교통사고의 과실을 따지기는 복잡한 법이다. 상대방은 다짜고짜 삿대질과 보통의 언어수준을 넘어선 단어를 내뱉었다. 주변의 자동차들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연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자동차의 빵빵 거림은 귀에 거슬렸고, 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곧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청난 보상이 뒤따랐다. 이것 역시 인생의 성과다. 단지 최악 사례(worst practice)일뿐이다.
보통네 삶은 언제나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의 뒤에는 반드시 그늘이 숨어있다. 단지 그늘이 빛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신뢰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 끝없이 추구하는 행복은 탐욕을 부른다.
나는 ‘덕분에’라는 단어를 맹신하기로 했다. ‘덕분’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뜻하는 말이다. 의미에 비해서 사용의 빈도가 높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때문에’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때문’은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을 의미한다. ‘때문’은 부정적인 맥락과 긍정적인 맥락에서 모두 쓸 수 있다. 그렇다보니 ‘때문에’라는 표현이 훨씬 사람들 입에 익숙하다. 잘해서도 잘못해서도 ‘때문에’가 등장하는 이유다.
나태주 시인은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고 말했다.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너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사랑뿐만이 아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언제나 서툴다. 행복에 익숙한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내내 행복 만하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삶도 아니다. 죽음과 다름없다. 사회학적 생명을 잃었고, 행복한테 종속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수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본능적인 선택으로 말이다. 하지만 선택을 한 후 반추하는 경우는 결과가 나빴을 때에 한한다. 행복하기만 한다면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추억이 없으니 그리움이 없고, 후회가 없으니 발전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사랑이 없다. 이미 행복하니 더 이상 기쁨이 없고, ‘자신’ 만 있고 ‘남’은 없으니 세상을 보듬을 수 없다.
우리는 덕분에 사는 삶이 아닐 수가 없다. 부모님 덕분에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부모님 때문에 구경하고 싶지 않던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덕분에’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탄생은 곧 기회를 말한다.
부모가 아니라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좋은 부모가 되면 된다. 그것이 기회다. 덕분에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기회는 오지 않는다.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기회는 사람의 일이고, 사람이 곧 기회다. ‘덕분에’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우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기억이 그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때문에’ 보다는 ‘덕분에’라는 내적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눈앞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통 “힘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위로가 남의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럴 때 ‘덕분에’를 찾아야 한다. 현재 내 앞에 놓여있는 힘든 상황이 ‘덕분에’라는 주문(呪文)으로 힘들었던 일을 잊게 하고, 곧 즐거운 일들이 펼쳐질 수 있다며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 그래서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보태면서 내가 내 삶을 응원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달팽이 식당>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오가와 이토의 장편소설 <츠바키 문구점>은 포포라는 애칭으로 대필가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포포는 어릴적부터 대필가인 할머니에게 혹독한 글쓰기 훈련을 받으며 자란다. 포포는 아름다운 손편지로 의뢰자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준다. 첫사랑에게, 15년 전 이혼한 남편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으로 기적 같은 순간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말이지, 포포한테 한 가지 좋은 것 가르쳐줄게.”
“뭐예요, 좋은게?”
“내가 줄곧 외워온 행복해지는 주문.”
“가르쳐 주세요.”
“있지, 마음 속으로 반짝반짝, 이라고 하는거야.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말이지, 마음의 어둠 속에 점점 별이 늘어나서 예쁜 별하늘이 펼쳐져.”
인생은 주문일 수 있다. 꿈을 꾸면 이루어지듯이, 주술처럼 빌어보면 꿈이 이루어지듯이 이루어지는거다. ‘덕분에’도 그렇다. 매사를 ‘덕분에’라고 주술처럼 읊조려보면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인들이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마치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그래서 더없이 행복해’라는 말을 ‘덕분에’에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이. 그래서일까. ‘덕분에’라는 말은 항상 사람이건 세상이건 밝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간다. 사소하기 때문에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사소한 것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것이다. 기상의 알람 소리가 사소하지만 아침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연이 있어야 주인공이 빛나는 것처럼.
우리네 삶은 ‘덕분에’ 살아간다. 밤이 있는 덕분에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힘들어 할 수 있는 덕분에 편안함을 알 수 있다. 아픔 덕분에 평화로운 삶을 느낄 수 있다. 슬픔 덕분에 기쁨을 만져볼 수 있다. 눈물 덕분에 웃음을 배울 수 있다. 어려움 덕분에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구름이 자욱한 날 덕분에 맑은 하늘을 느낄 수 있다. 지하철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 덕분에 내 얼굴의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장면들이 만들어진다. 그 중에서 ‘덕분에’ 떠오르는 기억과 ‘때문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덕분’으로 떠오르는 장면에는 웃음이, ‘때문’으로 떠오르는 장면에는 씁쓸한 미소가 나온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너 덕분에’ 결국 너와 내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
‘덕분에’는 원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덕분에 모두 잘 될 것 같은, 또 위로가 되어주는 응원의 단어 말이다. ‘덕분에’는 해피엔딩을 위한 말이기도 하다.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친구 같고 연인 같고 이웃 같은 말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겨울을 춥지 않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단지 봄이 온다는 희망이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줄 뿐이다. 결국 우리는 겨울 덕분에 따뜻한 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