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것 중에 큰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다
# 하루.
아침, 겨우겨우 잠에서 깨어나 초입(初入) 햇살 보다 신문을 먼저 찾는다. 손수 현관 앞 신문을 집어 든다. 가로로 길어진 눈을 세로로 세운다. 두터운 종이 신문의 기사제목 만 훑는다. 아침 습관이다. 나쁜 기사가 없다.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에게는 좋은 기사만 올라와 있는 신문을 만들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점심, 배가 고프다. 식사하러 갈 곳은 정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세운다. 시침(時針)이 12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다. 사무실은 주변의 자리가 텅 비어있다. 앞선 사람들이다.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긴다. 몇몇 사람들과 눈 대화를 나눈다. 또 한 끼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런데 오늘은 뭘 먹지?
저녁, 가족과 함께 있다. 휴식을 취하기보단 내일의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집은 바깥보다 훨씬 시끄럽다. 집안에는 사내들이 많다. 두 아들에다 아빠까지 포함해 3형제라 부른다. 가장(家長)이니 집안 식구들의 상처를 보듬어줘야 한다. “그랬니?” “그랬어요?” 라며 다독여준다. 가족을 사랑해서, 또 마음 한쪽에서는 늘 미안하기 때문이다.
새벽, 행복하다. 꿈을 꾸고 있는,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행복하다. 나이의 겹이 두꺼워질수록 실망은 줄이고 기쁨은 늘리려고 노력 중이다. 이내 곧 또 다른 날의 아침이다.
# 사랑.
정 깊은 덕담들이 오고갔던 새해가 훌쩍 지나가고 있다. 영겁의 시간이지만 신념은 항상 작심삼일이다. 세게 빌었던 신년의 소망과 희망, 각오는 어느 틈에 끼여 있나. 겹겹이 쌓였던 새해 다짐들은 여전히 얇고 짧기만 하다.
그럼에도 희망이 보인다. 새로운 태양 아래, 햇살을 느껴본다. 벌거벗은 나무 위에도, 새롭게 하루하루를 살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서울역 지하도에 자리한 노숙자의 종이박스 하우스에도, 메마른 남산의 정상에도 희망이 흐른다. 아파트촌의 이름 모를 나무 위에서 들려오는 까치의 외침이 구성진 게 더욱 희망차다.
사람들의 희망은 서로의 힘으로 받쳐질 때 오롯이 꽃을 피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희망의 크기는 상관없다. 희망이 작을지라도 성취는 기쁨을 준다. 우리 모두가 원망은 멀리하고 사랑과 희망으로 빛나는 한 해가 작심삼일이 아니라 습관으로 정착되기를 바래본다. 세상에는 사랑만큼 큰 것이 있을 수 없다.
# 우리.
그대를 만남이/ 나에겐 큰 행복입니다/ 그대와 동행이/ 나에겐 큰 기쁨입니다/ 혼자가 아닌 삶/ 함께 걸어 줄 누군가 있다는 것/ 그것보다 더 마음 든든한 것이 있을까요/ 내가 행복한 이유에 대해/ 매일 한 가지씩 찾다 보니/ 하루하루 더 감사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겐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겐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행복이기에/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하나 하나가/ 한 떨기 꽃이 될 수만 있다면/ 그대 가슴에 안겨 주고만 싶습니다/.
용혜원 시인의 <함께 가는 길에>라는 시다. 그대와 함께 함이 기쁨과 행복이요 축복이라고 노래한다. 세상을 살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퍽이나 많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함께 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못 믿게 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믿음 속에 있는 우리는 평화롭고 고요하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여야 강력한 힘을 모을 수 있다. 그 힘이 바로 서로를 지켜준다.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사랑과 행복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은 바로 ‘우리’다.
# 나무(吾無).
겨울은 춥다. 추운 날씨가 사람들에게 옷을 껴입게 만든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다. 몸이 따뜻하면 마음도 따뜻해진다. 지금, 사람과 자연은 모두 겨울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한 줄로 서 있는 가로수들이 추워 보인다. 겹겹이 두텁게 감싼 사람과 달리 겨울나무는 맨 몸으로 서있다. 매서운 추위와 눈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성자(聖者)의 삶과 많이 닮았다.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무에 대한 깊은 사랑이,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나무를 가엾게 여기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전 신문에서 나무를 ‘내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했다는 칼럼을 읽었다. 아마 ‘나무’를 ‘나(吾)’와 없을 ‘무(無)’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다. 칼럼은 ‘나무는 햇빛을 피하는 그늘도 되고, 성글지만 비를 피하는 우산도 됩니다. 아이들 놀이터도 되고 그네를 매는 기둥도 됩니다. 베어져서는 집을 짓는 재료나 땔감으로도 쓰입니다.’라고 했다.
공감이 갔다. 나무는 무엇이 되겠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없는’ 마음이 바로 나무의 마음이다. 나무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봄이면 푸른 잎으로 신록의 힘을, 여름에는 그늘로 시원함을, 가을에는 단풍으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추위가 찾아 들기 시작하면 나뭇잎에서 엽록소가 사라지게 된다. 잎은 붉고 노란색으로 변한다. 급기야 영양분을 뿌리와 줄기에 저장하기 위해 나무와 잎은 서로 이별한다. 나무는 얼어 죽지 않으려고 수분을 나뭇가지 끝까지 공급하지 않는다. 겨울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떨쳐 버리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다. 겨울나무는 우리들에게 ‘나를 버리는’ 사랑과 ‘그래도 봄이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래된 습관과 관행이 분신처럼 주변을 맴돌게 한다. 사랑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나무처럼 주는 사랑만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받으려고만 한다.
겨울나무처럼 나를 넘어서야겠다고 생각해보자.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내가 없다’는 나무처럼, 한 겨울을 버텨 나가는 겨울나무처럼 살아보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 지금이야 참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이 앞에 있을지라도, 참고 이겨서 봄에 보여줄 의젓함을 마음속에 다져보자.
겨울나무가 주는 건 고통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의 모습이다. 나무, ‘나는 없다’가 바로 나무의 힘이요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꼿꼿이 서 있는 나무야말로 세상의 곳곳을 가장 잘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어머니.
정호승의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 나온 이야기다.
한 청년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아주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겠다면서, 청년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녀의 말을 그래도 따랐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 손에 들고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들떠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갔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이 땅바닥에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청년은 놀란 얼굴로 땅바닥에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큰 것 중에 큰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