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

단식이 뭔지도 모르면서

by NaeilRnC

단식(斷食)과 금식(禁食)은 일상적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목적과 동기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우선 단식은 외부적 요인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의 섭취를 하지 않는 것이라면, 금식은 치료나 수행과 같은 내부적 요인에 대한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음식의 섭취를 하지 않지만 소금과 물은 섭취가 가능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최근, ‘단식’이라는 말을 내세운 장면을 봤다. 그런데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의지와 달리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 물에 꿀이 들었는지, 포도당이 들었는지, 산삼물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단식을 했다는 사람치고 얼굴의 때깔이 나보다 더 좋아 보인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단식’을 하겠다고 했으면, 적어도 그 말의 뜻과 범위를 분명히 해야지 무엇을 어디까지 끊는다는 건지 설명도 없이 물을 저렇게 잘 마시면서 단식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보통 단식투쟁은 부당한 것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강한데,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우셨고, 똑똑한 분이기 때문에 감히 그분의 생각을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만, 나 같은 무지몽매한 자가 보기에 그저 ‘쑈’ 같은 퍼포먼스는 그만두셨으면 한다. 단식을 하실 거면 제대로 하시길 바란다.


사실 “제대로”라는 말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 몸을 망가뜨릴수록 진정성이 올라가는 것처럼 취급되는 순간, 그건 투쟁이 아니라 관객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된다. 더 이상 우스운 꼴을 보이지 말자!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단식”이라는 단어를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 단식이든 금식이든, 그건 애초에 인간의 몸을 담보로 하는 방식이다. 몸을 담보로 한다는 건, 말의 무게가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무게를 남에게 떠넘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몸이 이렇게 힘들다”는 장면이 커질수록,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멈추고 감정만 소비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주장도, 사실도, 책임도 모두 흐려진다.


나는 누군가의 억울함을 함부로 재단할 만큼 똑똑하지 않다. 다만, 억울함이 진짜라면 더더욱 정확한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무엇이 억울한지, 어떤 근거가 있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요구가 사회에 어떤 비용과 결과를 남기는지. 그걸 말로 설득할 수 없는 순간에만 “몸”을 꺼내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순서가 거꾸로다. 이유는 빈약한데 장면은 과하다. 논리는 얇은데 연출은 두껍다. 그러니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고, 대신 피곤해진다.


차라리 솔직하면 된다. 단식이 아니라면 단식이라고 하지 말고, 섭취하는 것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 “이건 금식입니다”라고. “이건 건강상 이유로 이렇게 조절합니다”라고. 그래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완벽함보다 정직함에 더 오래 머문다. 반대로, 애매한 말로 포장하고 엄숙한 표정을 덧칠하면 그 순간부터 신뢰는 빠르게 말라간다. 신뢰가 마르는 순간,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결국 남는 건 “쑈”라는 평가뿐이다.


결국 이건 단식이냐 금식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말의 태도의 문제다. 진짜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몸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언어를 정돈해야 한다. 반박 가능한 주장으로 말하고, 검증 가능한 근거로 설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요구로 버텨야 한다. 그게 되면 굳이 몸을 꺼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따라온다.


그러니 제발, 단식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지 말자. 누군가의 절박함을 흉내 내는 순간, 그 절박함을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자리는 더 좁아진다. 그리고 그 좁아진 자리 위에서 우리는 또 서로를 조롱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이제는 장면이 아니라 내용으로 싸우자. 퍼포먼스가 아니라 책임으로 말하자. 그래야 진짜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게, 우스운 꼴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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