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9

나이가 들수록 눈을 싫어하는 이유

by NaeilRnC

내가 어렸을 때는 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

지금은 상상도 없을 만큼 눈이 많이 쌓여서 모든 공간이 마치 침대 같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며 눈사람을 만들고, 비료포대를 구해서 산으로 올라가 눈썰매를 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눈을 ‘놀 거리’로만 봤다. 눈은 기다리는 것이었고, 오면 무조건 반가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 오는 게 싫어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출근길’이 걱정됐다.

길이 얼마나 막힐지, 버스가 제시간에 올지, 지각을 면할 수 있을지.

눈이 그치면 그다음은 ‘퇴근’이 걱정됐다.

낮에 녹았다가 밤에 다시 얼어붙은 길, 어설프게 뭉개진 눈더미, 보이지 않는 빙판.

눈은 내릴 때보다, 남아 있을 때 더 성가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비가 더 낫다고 느낀다.

우산이 젖는 것도, 신발이 젖는 것도 여전히 극도로 싫지만 비는 ‘처리’가 된다.

내리면 내리는 대로 흘러가고, 그치면 그친 대로 정리된다.

반면 눈은 깔끔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내릴 땐 조용하지만 녹기 시작하면 질척해지고, 밟히면 검게 변하고, 얼면 위험해진다.

하얀 얼굴로 시작해 결국 회색의 잔해를 남긴다.


내가 눈을 싫어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사고의 기억이다. 눈이 적당히 내리고 날이 유난히 차가웠던 어느 날, 터널로 진입하다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터널은 오르막이었고, 나는 속도를 줄였다. 그게 화근이 됐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세상이 뒤집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렉카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차는 버려야 했지만 몸은 멀쩡했다. 그런데 그 뒤로는 눈이 내리기만 해도 그날의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26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까지 생생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 기억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체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잊자고 해도 몸은 먼저 반응한다. 흰 눈을 보면, 나는 풍경보다 상황을 계산한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건 눈을 덜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눈 위에 덧씌워진 ‘책임’과 ‘경험’이 늘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겨울의 첫눈을 보면서도 마음 한편이 설레기보다 먼저 단단해진다.

하얀 것은 여전히 예쁜데, 그 하얀 뒤에 따라오는 것들을 나는 너무 많이 알게 됐다.


그런데 요즘은 눈이 잘 오지 않는다. 대신 추위가 찾아온다. 내일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극한 한파가 찾아온다고 한다. 예전에는 추위가 오면 눈이 따라왔는데 요즘 겨울은 ‘하얀 겨울’ 대신 ‘마른 겨울’이다.

길은 깨끗한데 공기가 칼 같고, 풍경은 멀쩡한데 피부가 먼저 긴장한다. 눈이 없으니 덜 위험할 것 같다가도, 오히려 더 무섭다. 눈은 보이기라도 하는데, 한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은 추운 겨울을 포근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은 눈 이야기를 쓰다가 결국 겨울 이야기를 했다. 내가 싫어하게 된 건 눈이 아니라, 겨울이 내게 들어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겨울은 놀이였는데, 지금의 겨울은 관리다. 눈이 오든 안 오든, 겨울은 계속 대비하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눈을 싫어하는 이유는 눈 때문이 아니라, 내가 계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계절을 즐기기보다 견디는 사람이 됐다.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하고, 겨울에는 여름을 생각한다. ‘요놈, 여름에 두고 보자’ 같은 마음으로.


내일은 많이 춥다고 한다. 내일도 별 탈 없는 하루가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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