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의 차이
회사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계약직과 기간제가 있다. 계약직은 2년의 계약기간을 보낸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 가능할 수 있지만 기간제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이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업무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정규직은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며 성과급과 상여금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계약직과 기간제는 다르다.
비정규직은 늘 “같은 일을 하는데 왜 다르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업무는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 많다. 책임도 비슷하고, 때로는 더 무겁다. 그런데 계약서 한 장이 사람의 값을 갈라놓는다. 누군가는 연말에 상여금과 성과급을 계산하고, 누군가는 연말에 계약기간을 계산한다. 같은 엑셀을 열고 같은 회의를 들어도, 한쪽은 ‘성과’를 쌓고 다른 한쪽은 ‘기간’을 깎는다. 같은 하루인데 한쪽은 적립이고, 다른 한쪽은 소진이다.
나는 이 차이가 단순히 돈의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은 결과일 뿐이고, 더 큰 차이는 마음의 자세를 바꾼다. 정규직은 “내년”을 전제로 말할 수 있다. 비정규직은 “연장되면”으로만 말한다. 정규직의 미래는 문장이고, 비정규직의 미래는 조건이다. 조건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작아진다. 계획은 사치가 되고, 불안은 습관이 된다.
조직도 그 차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업무가 같아도 ‘자리’가 다르다. 같은 팀이어도 발언의 무게가 다르고, 결정 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깊이가 다르다. 회의실에서 어떤 사람은 의견을 낸다. 어떤 사람은 반응을 맞춘다. 무엇보다 일이 끝난 뒤 남는 감정이 다르다. 정규직은 힘들어도 “버티면 쌓인다”를 믿지만, 비정규직은 힘들수록 “버텨도 남는 게 있나”를 먼저 계산한다. 같은 피로인데, 회수 가능성이 다르다.
계약직은 그나마 ‘전환’이라는 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문이 있다는 건 희망이지만, 그 희망은 보통 ‘조건’으로 지급된다. 문 앞에 서 있는 동안은 자세를 계속 고쳐 잡게 된다. 모난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눈치를 늘리고, “내가 여기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성과로 증명하려 든다. 그러다 보면 성과를 쌓는 게 아니라, 자신을 얇게 만든다.
기간제는 더 선명하게 다르다. 처음부터 끝이 적혀 있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끝이 정해져 있으면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적당히 선을 긋고 살거나, 끝까지 달리다가 스스로를 태우거나. 기간제에게 회사는 ‘성장 공간’이 아니라 ‘통과 구간’이다. 통과하면 다음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버틴다. 그런데 다음이 없으면, 남는 건 경력이 아니라 공백이다. “열심히 했다”는 말이 ‘다음’으로 환전되지 않으면, 결국 그건 다 쓴 몸의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회사가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이 무섭다고 느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직무설명서에 쓰여 있지 않다. 대신 사람의 태도, 말투, 불안, 그리고 침묵에 새겨진다. 조직은 계약 형태로 사람을 나누고, 그 나뉨은 사람 사이의 시선을 바꿔놓는다. 누군가는 “왜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편해?”라고 생각한다. 이해가 아니라 비교가 먼저 올라온다. 비교가 올라오는 순간부터 관계는 이미 경쟁이 된다. 결국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게 회사다.
나는 그들과 같은 문서를 만들고 같은 회의에 참석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늘 계약기간을 세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성과’가 남아야 하는데, 내게 남는 건 자꾸 ‘기간’뿐이다. 그래서 내가 피곤한 건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언제까지인지를 계속 계산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일을 한 게 아니라, 시간을 깎아 먹힌 느낌이 든다.
내일도 출근은 할 것이다. 다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바꾸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지침은, 월급명세서보다 계약서의 날짜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 날짜가 눈앞에 있는 한, 나는 오늘을 살면서도 내일을 저당 잡힌 기분으로 살 수 밖에 없다.
흔히들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가 온다”고 말한다. 그 말은 대체로 틀리지 않다. 다만 전제가 있다. 미래를 ‘올 수 있게’ 설계된 사람에게만 맞는 말이다. 현재에 충실한 결과 미래를 보장받은 사람들은 대개 정규직이었다.
그들이 성실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성실이 회수 가능한 구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성실은 같은 속도로 소모되는데, 같은 속도로 적립되지 않는다. 같은 노동인데, 어떤 노동은 ‘경력’이 되고 어떤 노동은 ‘기간’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현재에 충실하라”는 조언은 가끔 너무 쉽게 말해진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이 가장 멀리서 던지는 말처럼.
학자들의 이론이 현실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현실이 이론을 배반하는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책상 앞에서 보면 노동은 변수고, 계약은 조건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계약이 변수를 삼킨다. 조건이 삶을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태도’보다 ‘형태’를 먼저 본다. 노력보다 계약서를 먼저 본다. 그게 내가 냉소해진 방식이다.
이제 겨울이 가고 또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 봄이 행복할지 잔인할지 나는 아직 모른다. 봄은 원래 따뜻해야 하는데, 내게는 ‘시작’이 아니라 ‘갱신’처럼 느껴진다. 꽃이 피는 계절인데도 마음 한쪽에서는 날짜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게 오늘을 더 무겁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