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살아진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를 ‘일잘러’라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결과물이나 성과로 사람을 구분하는 대신 일을 “어떻게 시키는지”를 먼저 본다. 업무를 잘 시키는 사람이 대체로 일을 잘한다. 적어도 내가 겪은 조직에서는 그랬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설명이 디테일하다. 디테일은 친절이 아니라 시간을 아끼는 기술이다.
목표가 뭐고, 범위가 어디까지고, 기준이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건 하면 좋고 이건 하지 말자” 같은 금지선까지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실수가 줄고, 되돌아오는 수정도 줄고, 결과적으로 모두의 시간이 덜 낭비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시키는 순간’에도 이미 결과물을 한 번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는 사람이다.
반대로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일을 제대로 시킬 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일을 시킨다. 그 이상은 설명하지 못하니까. 일을 수행해야 할 사람의 역량, 현재의 상황, 업무량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모양”뿐이다. 그래서 지시는 늘 애매하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
“알아서 잘.”
“그냥 빨리.”
그리고 이 ‘대충’과 ‘알아서’와 ‘빨리’ 사이에는 언제나 지뢰가 깔려 있다.
문제는 지뢰를 깔아놓은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의 업무 전달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일이 무심코 ‘툭’ 던져진다.
툭 하고 던져놓고는, 그 순간부터 그 일은 더 이상 ‘자기 일’이 아니다. 어차피 수행자가 처리할 테니까.
그러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다시 등장한다.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과 함께.
그 질문은 피드백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책임의 재배치다. 이상하게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말’을 잘한다.
뭔가 찝찝한데, 설득력이 있는 말투. 정확한 내용은 없는데, 분위기로 맞는 말처럼 들리게 만드는 능력.
그리고 그 말의 끝에는 꼭 이런 문장이 붙는다.
“내가 이런 걸 하자는 게 아니잖아.”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그러면 수행자는 할 말이 없어진다. 의도는 문서에 남지 않으니까.
결국 남는 건 결과물뿐이고, 결과물은 늘 “의도와 달랐다”는 이유로 틀린 것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일은 다시 시작된다. 같은 일을 두 번 하는데, 두 번째는 더 급하다. 그리고 더 애매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확신한다. 일못러에게 내일이 없는 게 아니라, 일못러의 방식에는 내일이 없다.
오늘의 애매함이 내일의 재작업이 되고, 내일의 재작업이 모레의 야근이 된다.
그렇게 일정은 계속 미끄러지고, 사람은 계속 닳는다. 닳는 건 수행자이고, 남는 건 지시자의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일을 한다. 살다 보면 살아지니까.
정확히는, 살아지도록 만드는 건 결국 내 쪽의 손이다. 내가 디테일을 다시 묻고, 범위를 다시 확인하고, 기준을 다시 문서로 남기고, 애매한 말을 구체화해야만 일이 굴러간다. 웃긴 건 그 과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들은 나를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일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시키는 방식’으로 보이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일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툭, 하고 일이 떨어졌다.
살다 보면 살아지니까. 일단은,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