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
어쩌다 보니 오늘의 느낌이 아니라 어제의 느낌이 되어버렸다.
16편 만에 약속을 어기며 죄인이 된 기분이다.(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을 잤습니다 ㅠㅠ)
어제는 회사에서 생일을 챙겨주었다. 뭔가 쑥스럽지 않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건성.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건성이었다. 이게 가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예전에 다녔던 리서치회사에서는 생일이면 전 부서가 들을 수 있게 노래를 불러줬다.
한 층에 여러 부서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서 당사자는 거의 공개처형이었지만, 대신 용돈은 짭짤했다는 소문이다.(난 생일이 지나 입사했고, 3개월 뒤에 회사가 부도로 짭짤함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최근까지 다녔던 회사는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다행인지, 그곳에선 9월에 권고를 당해서 내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요즘 시대의 퇴사는 흔적관리라는 말이 있는데, 아주 적절하게 짤려서 다행이다.
그리고 지금의 회사. 여긴 확실히 건성이었다.
1월 생일자 2명 중 한 명은 26일이 생일이었는데 어제 나와 같이 촛불을 껐다.
생일도 이제 묶음으로 처리된다는 게 한편으로 재미있었지만, 그게 효율이고, 타협이다.
더 재미있는 건 생일자가 둘인데 케이크는 하나였고, 9명이 나눠먹었다는 점이다.
'챙김'을 단체로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는 방식. 매우 효율적이면서 건성이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효율적인 건성이 이상하게 비효율적이었다. 누군가는 케이크를 사러 회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의 제과점을 다녀왔고, 생일자에게 줄 문화상품권 지권을 사기 위해 서울까지 갔다 왔다.
여기서부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성인데 왜 이렇게 진심인거지?
근무시간에 그것도 집중근무 시간대인 오후 1시 이후에 케이크와 문상을 사러 2시간을 비우고 돌아오는
이 의식이 요식행위임에도 너무 진심이라 웃겼다. 건성인데 건성 아닌 정성스러운 움직임.
말이 좋아 건성이지, 이동거리만 보면 외근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생일이 누군가의 외근을 만들었고
담당자는 외근의 성과를 자랑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는 생일이 의무이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생일을 챙겨주었다는 점은 매우 감사하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생일상을 받지 않았다.
내가 고생한 것도 없는데 축하를 받는 게 어색했고, 고향에서 어르신 생신이 동네잔치였던 전통 때문에
어린 나에게도 미역국, 잡채, 불고기까지 한 상을 차려주신 어머니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내 생일은 불고기가 빠지고, 잡채가 빠지고 결국 그냥 생일이 되었다.
올해도 그냥저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덕분에 문화상품권이 생겨버렸다.
나는 이 문화상품권을 여자친구에게 줄 예정이다. 나에게 이 종이는 그저 담배값으로나 소비될 예정이지만 여자친구 손에 들어가면 유용한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건성의 느낌이 강했지만, 유용한 상품권을 주신 회사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