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17

조직의 무서움

by NaeilRnC

대부분의 회사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1. 일 잘 하고 성격도 좋은 상사

2. 일은 못하지만 성격 좋은 상사

3. 일을 못하는데 고집이 센 상사

4. 일도 못하고 성격도 안 좋은 상사


이 네 가지는 조직심리학이 아니라, 그냥 출근의 역사다. 회사라는 곳은 복잡한 척하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결국 매일 마주치는 건 “일”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람은 대체로 이 네 분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 같은 경우 4번은 바로 들이받는다. 이건 성격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생존 방식이 그렇다.
4번은 “말”로 사람을 닳게 만든다. 그러면 나는 “말”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는다.
들이받고, 멀어진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


3번은 더 어렵다. 3번은 노답이라 버린다. 왜냐하면 3번은 논리로 설득이 안 된다.
일을 못한다는 건 개선될 수 있는데, 고집이 세다는 건 개선의 문을 잠그기 때문이다.
게다가 3번은 자기 고집을 “원칙”이라고 부른다. 원칙은 멋있는데, 고집은 대개 일정만 망친다.


문제는 3번이 어떤 조직 문화 안으로 들어갈 때다.
나는 여태 “직설/충돌”이 비교적 빠른 해결로 이어지는 환경을 더 많이 겪어왔다.

그래서 3번이 있으면 보통은 이렇게 끝난다.

누군가가 직구를 날린다.

3번이 발끈한다.

회의실 공기가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최소한 “서로 싫어한다”는 사실은 공론화된다.


싫어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싫어하는 사실이 공개되는 게 오히려 안전할 때가 있다.
공개되면 조심이라도 하니까. 그런데 내가 “여초 조직”에서 몇 번 체감했던 건, 3번을 상대하는 방식이 좀 다르게 굴러갈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서는 3번이 대놓고 깨지지 않는다. 깨지는 대신, 공기가 바뀐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회의 자리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끝나고 나서 “아… 그건 좀…”이 시작된다.

점심은 먹는데, 실은 점심이 아니라 사건을 씹는다.

그리고 그 씹힘이 어느 날부터 ‘규칙’이 된다.


여기서 무서운 건 뒷담화 그 자체가 아니다.

무서운 건 조직의 규범이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굳는 과정이다.

학술적으로 포장하면 “비공식 제재(informal sanction)”다.

나는 그냥 이렇게 번역한다. 말로 안 때리고, 자리로 때리는 방식.

이렇게 되면 3번은 종종 자기가 씹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공식 회의에서 반대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3번 입장에서는 이렇게 정리된다.


“다 동의했잖아?”
“다들 나랑 잘 지내잖아?”


그러다 어느 순간, 3번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도’ 혼자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데 이미 사회적으로 끝난 상태다.
나는 이걸 가끔 ‘산 송장’이라고 부른다.


출근은 하는데, 신뢰는 없는 상태.

발언은 하는데, 반응은 없는 상태.

결정은 내리는데, 실행은 천천히 늦어지는 상태.
표면은 정상인데, 내부에서만 조용히 부패가 진행되는 상태.


이 상황이 왜 머리가 아프냐면, 나는 3번을 싫어해도 “싸우면 끝난다”는 쪽에 가까운데,
이 방식은 안 끝난다. 끝내지 않고, 말려 죽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도 같이 닳는다.
왜냐하면 매일 “티 안 내기”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티 안 내기도 아주 정교한 노동이다. 감정노동.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여초/남초’가 문제라기보다, 조직이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이 문제다.

어떤 조직은 갈등을 충돌로 처리한다. (빠르지만 시끄럽다)

어떤 조직은 갈등을 관계로 처리한다. (조용하지만 오래 간다)


3번 상사는 어느 곳에 있든 답이 없다. 다만 어떤 곳에서는 빨리 들킨다. 어떤 곳에서는 오래 산다.
오래 산다는 게 좋은 건 아닌데, 오래 산다. 그래서 나는 요즘 3번을 만나면 한 가지를 먼저 본다.


이 조직은 갈등을 ‘말’로 푸는가, ‘공기’로 푸는가. 말로 풀면 싸우고 끝나지만, 공기로 풀면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 그리고 그 진행은 어느 순간부터 “회사 문화”라는 이름이 된다.


결론?
회사에는 네 종류의 상사가 있고,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4번이 아니라, 3번이 살아남는 구조다.

3번은 그렇게 오래 살아남아 그 조직에서 가장 강한 놈이 된다.

세상은 그렇게 강한 놈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놈이 이겨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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