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18

도와달라면서 일을 던지는 기술

by NaeilRnC

그에게 이곳은 천국인 것 같다. 일을 못 한다고 쉽게 짤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는 척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는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누군가는 윗분들께 그의 일을 고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윗선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가 정말 열심히 척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오전 업무는 10시에 시작이다. 유일하게 유연근무를 사용하고 있다.

젖먹이 영아를 키우는 직원은 유연근무를 하지 않는다.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출근하면 가장 일을 잘하는 선임대리를 부른다.


그 선임대리는 이곳의 창립멤버라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다.

난 그녀에게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일주일째 인수인계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독점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곧 출산휴가를 간다는 것이다.

그녀가 떠나면, 이곳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대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면 그는 또 누군가에게 일을 던질 것이다. 그게 나다. 나는 그보다 나이와 경력이 많다.

하지만, 나의 직급은 그보다 아래다. 그에게 나는 일 시키기 딱 좋은 아주 유용한 도구다.

입사한 지 이제 15일째. 나보다 직급이 높은, 그래서 연봉도 많이 받는 그의 업무는 4개. 나는 9개.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일을 다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일을 잘하시잖아요" X미.

어제 그는 나에게 자기가 하던 일을 던졌다. "도와달라"면서 던진 일을 오늘 보고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오늘 2개의 일을 또 던졌다. 하나는 전화를 돌리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묻는다.

"그 일에 대해 보고해 주세요"


이 말을 하기 전, 전화업무를 나에게 던지면서 그는 말했다.

"지금 특별히 바쁜 거 없잖아요"


그리고 10분이 지나 조용히 메신저로 날아온 '보고요청'.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짜증 나서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데 사무실이 너무 조용했다. 순간 정적.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참고 있다는 걸.

왜지? 왜 알고 있지? 내가 티를 심하게 냈나?

그 이유는 어제 '티'를 냈기 때문에 아시는 분은 아실 거다.


한때 나는 이라또였다.

지가 뭐라고 일 못하는 상사를 들이받고, 사장과 싸우며 툭하면 퇴사로 협박했던 이라또가 나였다.

하지만 사장은 나를 쉽게 자르지 못했다. 나를 버리면 회사가 대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보통 종합발전계획수립 연구용역은 분야별로 전문가가 붙는다.

A라는 지자체에서 8개의 분야에 대한 중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려면 8명의 전문가와 그들을 조율할 PM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야 진행되는 '종. 발'을 나는 부사수 1명과 3개를 쳐냈다.


'종. 발'제안서를 쓰려면 최소 5명이 일주일을 풀야근해야 제대로 된 제안을 할 수 있는 뼈대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부사수 1명과 그 제안서를 3일 만에 써냈다. 자랑이 아니라, 내 스타일은 '갈아넣기'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못한다. 난 벽지였으니까. 그러니 사장도 나에게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늑대가 개 밑에서 일하고 있냐"


아! 어떡하지? 그랬던 난데! 내가 낸데! 이 참에 그놈을 들이받을까?


그러기엔 나의 경험이 너무 적다. 그렇다고 버티자니 폭발할 것 같은데.

오늘의 느낌은 오랜만에 '혼돈', '폭풍의 카오스', '아노미' 상태다.

이럴 때는 임재범의 '고해'가 생각난다. '어찌합니까! 난 어떻게 할까요!' 딱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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