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도
생각해 보면 내게 시간이 느렸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주 잠깐. 하루가 너무 길었던 때가 있었는데 난 그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번아웃'. 무기력과 우중충한 생각들이 계속되면서 처음 정신과를 찾아갔을 때 내가 들었던 병명이었다.
내가 처음 찾아갔던 그 병원에서는 잠깐의 상담이 이루어졌고, 의사 선생님은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를 다른 병원에 소개해줬다. 그만큼 내 상태가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이곳은 평일에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진료를 받기 힘들지만, 제가 전화를 해 두었으니 오늘은 2~3시간 정도만 기다리시면 진료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망설이지 말고 최대한 빨리 가 보세요"
소개받은 그곳은 주말이었음에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걔 중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도 있었다. 그만큼 이 나라에 마음의 병이 깊었구나라는 생각이 크게 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차례를 기다리면서 나의 무엇이 문제였는지 고민해 봤다.
귀찮음, 속도가 나지 않는 업무속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딱히 내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간 후 생각이 달라졌다.
미모의 매우 어려 보이는 원장선생님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는데, 순간 눈물이 흘렀다.
별것도 아닌데, 내 얘기를 들어주고 가끔 호응을 해 주던 짧은 대화에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약을 받아오고, 진단서를 받아 회사에 제출했는데 사장의 반응이 정말 흥미로웠다.
"나도 우울증이야! 매일 슬프다. 근데 난 일로 우울증을 치료하고 있어! 그러니 너도 지금보다 더 정신 차려서 일에 집중을 해 보는 게 어때?"
위로도, 이해도 없는 그저 리스크 관리를 위해 내 상태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일이나 해"라는 말을 듣자마자 욕을 뱉을 뻔했다. 개 XX. 하지만 뱉지 못했다. 욕을 뱉는 순간 상대의 무례보다 나의 태도만 남아 책임이 늘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상담했던 의사 선생님은 내 원인이 사장과 회사, 그리고 일 때문이라면서 퇴사를 권유했는데 막상 사장의 저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위로를 기대했던 일말의 희망이 사라지면서 회사에 대한 내 마음의 온도를 낮출 수 있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그리고 내 우울함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나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다. 그저 단지 저녁 한 끼 같이 먹고 싶었을 뿐이지만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다.
그들은 회사의 사장처럼 나를 못 살게 하진 않았지만,
어려부터 들어왔던 '장남', '장손'의 틀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2녀 1남 중 막내라고 하면, 내가 어려서부터 뭔가를 독차치하며 자랐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그전에 나에게는 '없는 집'의 '장남'이라는 타이틀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었다. 나에게는 막내라는 위치보다 '역할'이 먼저 주어졌고 역할에 대한 책임은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에 지치고, 가족들에게 지쳐 혼자 멀리 지방에 내려가 산 적도 있다. 원주, 광주, 대구, 춘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 뭔가 더 나의 부담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큰 중력처럼 다가왔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뭔가 기운이 더 커진 느낌.
그걸 사람들은 그리움이라고 하거나 애틋함이라고 할 테지만 나에게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압박이었다.
그동안 내게 시간은 느린 적이 거의 없다. 느린 시간은 병이었고, 빠른 시간은 의무와 책임이었다.
나는 그 중간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시간은 빠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