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23

극적 화해

by NaeilRnC

어제 오후 ‘그놈’을 들이받았다. 이유는 이랬다.

며칠 전, 그는 내게 A에 관한 기획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아! 그럼 하세요”였다.

설명은 없고 지시만 있었다. 뭐지? 싶었다.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면책이 아니라 출발 신호가 되어 버린 경험은 처음이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지시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다른 지시 B가 내려왔다.

나는 A를 붙잡고 있다가 B로 옮겨갔고, 다시 꾸역꾸역 다른 지시사항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A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물어봤다. 나는 “참고하라고 주신 자료를 보고 작성 중”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질문이 문제였다. 그는 갑자기 “업체 컨택했냐?”고 물었다.

황당했다. 업체 컨택? 왜? 내가 참고하라고 받았던 자료에는 업체 컨택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었다.

그 단계가 필요하다는 말도, 왜 필요한지도, 어느 업체를 어디까지 컨택해야 하는지도, 아무 설명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마치 당연한 절차를 내가 누락한 것처럼 말했고, 순간 투명인간 취급하던 사무실 공기가 변했다.

모든 시선, 모든 귓망울이 나에게 쏠렸다.

이에 더해 그는 공개처형하듯 “왜 물어보지 않고 일을 하느냐”며 소리쳤다.

나는 순간 참지 못했다. “그럼, 처음부터 A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하셨어야죠!”라며 들이받았다.


순간 정적.


안 그래도 미팅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는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단도리’하듯 나를 몰아세웠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이 회사에서 질문은 대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면 “그것도 모르냐”로 돌아오고, 질문을 안 하면 “왜 안 물어보냐”로 돌아온다.

둘 중 무엇을 해도 틀리는 게임이라면, 적어도 규칙은 미리 알려줘야 하는데,

그는 규칙을 알려주지 않은 채 심판만 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국장이 나와 그를 불렀다. 업무 분장에 대해 얘기해 보자는 자리였다.

나는 그제야 이게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누가 일을 어떤 방식으로 ‘밀어 넣고’ ‘받아내는지’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회사에서 싸움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넋두리는 예상대로였다.

“물어보지 않고 일을 한다.” “경력자라 기대가 컸던 것 같다.” 등등, 대놓고 나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일단 다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A는 경험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설명 없이 던졌고, 그 사이에 B가 내려왔고,

다시 A를 물어보길래 자료 기반으로 작성 중이라 했는데, 갑자기 업체 컨택이 등장했고,

그건 처음 듣는 단계였다고. 그런데 놀라운 건 국장의 말이었다.


“그건 내가 지시한 겁니다.”


뭐? 왜?


국장의 입장은 이랬다. “피드백이 빨랐다.”


나는 일을 할 때 최대한 빨리 초안을 끝내고, 그 다음 일을 시작하는 편이다.

초안을 빨리 만들고, 그 다음에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완성도를 올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곳의 공기는 다르다. 일이 며칠씩 걸린다.

상황 때문에, 예산이 부족해서, 변수가 많아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붙는다. 물론 변수가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내 상식으로는 일단 급한 일을 끝내놓고, 나중에 수정이나 보완을 하면 된다.

문제는 이곳이 ‘완료’가 아니라 ‘오늘 닥친 시간’에만 집중하는 업무 스타일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래서 국장이 처음으로 일을 시켰을 때 국장의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고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국장에게 보고했고, 수정했고, 보완해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니 국장 입장에서는 ‘이 사람은 다른 일도 더 시켜도 되겠다’고 느꼈을 것이다.


A를 던져놓고 진행 상황을 묻는 와중에 B를 같이 얹은 것도, 그가 아니라 국장의 판단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고, 그는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게 갈등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그와의 오해는 일단 종료다. 나는 그가 자의적으로 내게 일을 던진다고 느꼈다.

보통 일을 전달하면 전후 사정을 알리고 내려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상식에서 그의 “툭”, “해”라는 지시 스타일은 ‘업무 지시’가 아니라 ‘투수의 직구’처럼 느껴졌다.

받는 사람이 다치든 말든, 일단 던지고 보는 직구.

그런데 그 직구가 사실은 감독(국장)의 사인이었다면, 문제는 공을 던진 사람만이 아니라,

사인을 주는 방식과 설명을 생략하는 문화에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들이받은 건 ‘그놈’ 개인이 아니라, 이 회사의 전달 방식 자체였다는 걸.

그리고 그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죄책감이, 어제부터 내 몸에 붙어 있었다는 걸.


오해로 생긴 불신이 풀리자, 나는 바로 사과했다.

내가 화가 났던 지점이 ‘그’ 개인이 아니라 구조였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감정을 그에게만 꽂아두는 건 공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국장의 지시를 전달하는 중간자였고,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나를 몰아세운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게 맞았다. 사과는 패배가 아니라, 오해를 끊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국장은 나름 명확하게 구획을 정리했고,

그 자리의 결론은 일단 “업무 분장과 지시 경로를 분명히 하자”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나는 안다. 오늘 풀린 건 갈등이 아니라, 갈등이 발생하는 경로였다.

그리고 경로를 아는 사람은 다시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지시를 따라가다, 결국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사람과는 화해했지만, 시스템과는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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