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기분은 나의 탓?
사실, 어제 하루 쉬었다.
불면증으로 밤을 새웠고, 몸살기운도 있어서 급하게 오전 6시에 팀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반나절 이상을 약 기운에 기대어 잠을 잤다. 일어났을 때 그나마 컨디션이 좋아졌고, 만시지탄의 마음으로 기운을 내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챙겨 먹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픈 날의 식사는 늘 의무에 가깝다.
먹고 나면 낫는 게 아니라, ‘먹었으니 버틸 수 있다’는 명분이 생긴다.
그리고 오늘 출근을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분 탓인가?
보통 인원수가 적은 소기업일수록 결근자에 대해 인사말이라도 “괜찮으냐”라고 물어볼 만도 한데,
이 회사는 그런 게 없었다. 어제 하루 쉬었다는 사실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모두의 일상에서 삭제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 “민폐를 끼쳤나?”를 먼저 계산했고,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입꼬리를 올려 “괜찮습니다”라는 표정을 만들어 붙였다.
표정은 빠르게 만들수록 더 진짜 같아 보이니까.
하긴, 출근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지난 ‘중년’의 신입자가 벌써 빠져 병가를 썼으니,
조직적으로 뭔가 단합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단합은 걱정이 아니라, 침묵의 합의일 수 있다.
“아픈 건 네 사정이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한다.”
그 문장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공기 중에 떠 있는 느낌.
사람들은 말을 안 했는데, 규칙은 말보다 선명하게 전달된다. 그래서 나는 더 조심해진다.
말도, 기침도, 얼굴색도.
아픈 사람은 원래 눈에 띄기 마련인데, 나는 오늘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픈 사람이었다.
경리직원이 출근하자 어제의 문서 처리에 대해 물어봤는데,
돌아온 답은 “아직 병가자가 없었는데 대리님이 최초”였다. 놀라움.
그리고 그 놀라움은 묘하게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기록을 깬 사람에게 주는 안내문 같았다.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여기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조직도 ‘병가자 0명’을 통한 생산성 증대의 조직문화가 있나?
아니면 누구도 감히 병가를 쓰지 못하는 분위기가 생산성처럼 포장되어 있는 건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조직이 가장 선호하는 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아파도 없는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 일 때가 많으니까.
어쨌거나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내 탓이 가장 크지만,
그래도 인사말 한마디 없는 이 조직이 신기했다.
그만큼 직원의 공백에도 끄떡없다는 과시인가?
아니면 병약한 계약직 따위는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인가?
실제로는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그 가능성보다, 이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먼저 해석했다.
그래서 내 죄책감은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규정처럼 작동했다.
내가 아픈 사실이 아니라, 내가 빠진 사실이 문제였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오늘, 아픈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깬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예전의 회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그곳은 적막했고, 사람들도 친절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침묵이 나를 검열하진 않았다.
여기는 다르다. 이곳은 업무시간 내내 노래를 틀어놓는다.
그런데 그 음악은 분위기를 밝히기 위한 게 아니라, 질문을 지우기 위한 것처럼 들린다.
“괜찮아요?” 같은 말이 들어갈 자리까지 멜로디로 메워버리는 방식.
아마 여기서는 따뜻함도 시스템처럼 운영된다. 틀어놓기만 하면 되는 따뜻함.
인사말은 비용이고, 걱정은 과로이며, 공감은 불필요한 절차다.
대신 스피커에서 나오는 밝은 소리가 ‘사람이 있는 척’을 해준다. 그래서 더 이상해진다.
소리가 많은데도, 내가 빠진 자리는 금방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내가 돌아온 자리도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아닌 자리가 된다. 그게 이곳의 친절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너를 괴롭히지 않지만, 누구도 너를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