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브런치처럼 해봐!
일상에서 무료함을 느낀다면, 그건 공짜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지불하는 유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돈이 들어가면 집중한다.
유료 강의는 결석을 줄이고, 유료 식단은 간식을 줄이고, 유료 여행은 아침을 일찍 열어준다.
돈이 들어간 순간 ‘아까움’이 생기고, 아까움은 실행력을 만든다.
그런데 회사생활은 재미가 없다.
'일'은 먹사니즘의 기초가 되는 돈이 생기는데, 유료의 무료함이라니.
돈을 받는데도 지루하다는 건 내 시간이 단순히 ‘교환’되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 시간이 ‘내 것’으로 남지 않는다는 뜻일까.
내가 시간을 쓴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써버린 것 같은 느낌.
퇴근길에 남는 건 성취가 아니라 소모다. 잔액은 늘었는데, 내가 줄어든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지도교수가 될 뻔했던 분의 1차 관문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도 그렇게 쓰기 싫었던 일기를 100일 동안 써야 했다.
습관이 무서운 건지, 어쩔 수 없었다는 체념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과정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사람은 원래 “해야 한다”로 시작하면 괴롭고, “하다 보니”로 바뀌는 순간부터 살 만해진다.
처음엔 과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늘은 뭘 쓸까’가 됐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내 일상을 오래 붙들었다.
억지로 쓰던 일기에서, 억지로라도 살아 있는 하루를 찾게 됐다.
그렇게 모아 왔던 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쓸모가 없어졌고, 그때 주변의 독자들이 브런치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작년 11월 12일부터 브런치를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겁이 났다.
‘내 글이 읽힐까’도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내 글이 남을까’가 무서웠다. 기록은 언제나 증거가 된다.
나는 그저 정리하고 싶었는데, 세상은 가끔 정리를 고백으로 읽는다.
그런데도 시작했다. 시작했으니 이제는 계속한다.
매번 조회수와 라이크, 팔로워의 증감을 신경 쓰면서도 브런치가 재미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료함을 극복하는 건 비용이 아니라 자발성이라는 걸, 나는 브런치를 하면서 뒤늦게 배웠다.
돈은 행동을 강제하지만, 자발성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회사에서 나는 하루를 ‘소비’한다. 그리고 브런치를 통해 하루를 ‘회수’한다.
회사의 시간은 회사의 목적에 맞게 정렬되고, 브런치의 시간은 내 감정에 맞게 정렬된다.
같은 하루인데, 정렬 방식이 다르니 체감도 달라진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세상에 소재가 너무 많았다.
추운 겨울날 집 밖에 나와서 내뱉은 한마디, 할인가격의 커피를 사러 갔다가 느꼈던 ‘마구니데이’ 같은 것들.
내가 흘려보내던 잡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글은 거창한 사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별것 아닌 순간에 더 잘 붙었다.
“오늘도 별일 없었다”는 문장 속에는 사실 별일이 너무 많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별일’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 됐고, 그게 내 작은 취미가 아니라 내 작은 구원이 됐다.
가끔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아직까지는 브런치가 재미있다.
적어도 내 마음이 ‘내가 한다’고 말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브런치의 재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조회수가 잘 나오면 기분이 좋고, 안 나오면 삐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증감이 내 하루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회사에서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내 하루를 결정해 버릴 때가 있다.
“그거 왜 그렇게 했어요?” 같은 질문 하나로, 내가 보낸 시간이 통째로 부정되는 날이 있다.
브런치에서는 그런 일이 덜하다. 내 문장이 최소한 내 편이 되어준다.
그런 나에게 여자친구는 “일을 브런치처럼 하라”라고 말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정말로. 내가 일을 ‘내 일’처럼 만들 수 있다면, 회사생활도 덜 텁텁해질 것이다.
하지만 브런치처럼 일하기는 쉽지 않다. 정해진 규칙이 있고, 내 위에 상사가 있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다. 회사에서 자발성은 종종 ‘공짜 노동’으로 오해받는다.
“열심히 하네”가 아니라 “더 해도 되겠네”로 번역되는 순간이 있다. 자발성이 의미가 아니라 자원이 되는 곳.
그곳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건, 때로 나에게 불리한 계약이 된다.
그래서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일은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다는 건 단순히 웃기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통제권이 없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재미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회사의 편의에 따라 생기거나 사라진다.
어떤 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투가 되고, 어떤 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미해진다.
‘유료’인데 ‘무료’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이것이다. 돈은 받지만, 내 시간이 내 것이 아니라서.
그리고 결정적인 건, 브런치는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다.
돈이 걸리는 순간, 문장은 책임이 되고, 책임이 되는 순간 재미는 관리가 된다.
나는 지금 그 관리 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일을 브런치처럼’이 아니라,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 속에서도, 내 문장만큼은 내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그동안 겪어온 회사생활을 정제 없이 적어 내려가면, 문장보다 먼저 현실이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늘 한 번 더 거른다. 사실대로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사실’만 남기는 쪽으로.
회사는 현실보다 기록을 더 무서워하는 곳이라서, 어떤 일은 ‘있었음’보다 ‘써졌음’이 더 위험해진다.
말로는 웃고 넘어가던 것들이, 글로 적히는 순간 갑자기 ‘사건’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을 검열한다.
브런치가 내 대나무숲이 되어주는 동시에, 대나무숲에도 CCTV가 달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펙터클한 일들이 많다.
“살아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세상에는 콩가루 같은 장면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콩가루를 콩가루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홍길동도 아닌데, 이름을 뺏긴 것처럼 자꾸 말을 잃는다.
“그건 이상하잖아요”라는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로 바꾸는 순간.
“그건 누가 책임지죠?”를 “일정 조율이 필요해 보입니다”로 바꾸는 순간.
사실은 분노인데, 문장은 온순해진다. 내가 온순해져서가 아니라, 온순한 문장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콩가루를 샤프란처럼 바꿔 적어야 하는 일이 쉽지 않다.
씹히는 모래를 향신료처럼 갈아서, 독이 덜한 문장으로 바꾸는 일.
분명히 화가 났는데 ‘화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고르는 일.
사실을 말하고 싶은데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문장을 눕히는 일.
회사에서 말은 늘 같은 방향으로 진화한다. 구체성은 줄고, 책임은 흐려지고, 표현은 무해해진다.
그렇게 말이 무해해질수록, 이상하게도 사람은 더 상처받는다.
무해한 말이 아니라, 책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적당히 유연하게, 나만의 대나무숲을 만든다.
대나무숲은 비밀을 폭로하는 곳이 아니라, 비밀 때문에 숨이 막히지 않기 위해 숨통을 트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사실”을 다 쓰지 못해도, “감각”만큼은 잃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이 억울했는지, 무엇이 우스웠는지, 무엇이 이상했는지. 그것만큼은 내 언어로 남기고 싶다.
결국 “일을 브런치처럼 하라”는 말은, 일이 나를 쓰기 전에, 내가 일을 쓰라는 뜻이다.
내 시간을 회사에만 맡기지 말고, 내 시간을 내가 다시 편집하라는 뜻일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일은 관리 속에서 하고, 글은 숨 쉴 수 있는 쪽에 둔다.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생각보다 중요한 생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