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떠넘기는 인간
호모 데페렌스는 라틴어 deferre /dɪˈfɜːr/ *(미루다, 넘기다, 맡기다)*에서 따온 말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책임을 다음 사람에게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인간을 뜻한다.
Homo deferens /ˈhoʊmoʊ ˈdɛfərənz/ 는 그 인간형의 이름이다.
떠넘김은 무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성실한 기술이다.
이런 유형은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을 ‘내 일’이 아니게 만드는 과정을 정확히 수행한다.
기록을 남기고, 예의를 지키고, 문장을 매끈하게 닦는다. 그래서 더 안전해진다.
누구도 틀리지 않으면서, 누구도 주인이 되지 않는 구조가 완성된다.
호모 데페렌스가 가장 먼저 쓰는 도구는 언어다.
“확인했습니다.”는 약속이 아니라 읽음의 증거가 된다.
“공유드립니다.”는 결정이 아니라 전달 완료가 된다.
“검토 부탁드립니다.”는 협업이 아니라 책임 이관이 된다.
문장이 공손해질수록 주어가 사라지고, 주어가 사라질수록 책임도 사라진다.
‘내’가 빠진 자리에는 늘 ‘부탁’이 들어온다. 부탁은 부드럽지만, 동시에 책임을 옮기는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
그다음은 프로세스다. 책임은 사람 사이를 흐르고, 그 흐름이 곧 성과처럼 취급된다.
‘넘겼다’는 말이 ‘끝냈다’로 번역된다. 회신이 결론처럼 보이고, 인수인계가 해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결정을 하지 않았다. 결정이 없으니 책임도 없다.
책임이 없으니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미뤄진다.
전형적인 장면은 이런 식이다.
상사 : 그 안건 어떻게 되고 있어요?
호모 : 아, 그 건은 OO에게 지시해 놓은 상태입니다.
상사 : 그래요.
또는
상사 : 이거 오늘 안에 정리 가능해요?
호모 : 네, 가능 여부는 OO님이 제일 정확히 아실 것 같습니다. 확인 부탁드릴게요
상사 : 그래요.
또는 더 흔하게 이런 방식이다.
호모 : OO님, 이거 제가 초안을 잡아봤는데 검토 좀 부탁드릴게요
대화는 깔끔하다. 그리고 로그도 남는다. 그런데 이 대화가 길어질수록 해결은 멀어진다.
여기에는 결론이 없다. ‘누가 결정했는지’가 없다. 대신 ‘누가 받았는지’만 있다.
공은 계속 굴러가고, 굴러가는 동안 업무는 ‘진행’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언젠가 공이 멈출 때, 멈춘 자리의 사람이 욕을 먹는다. 보통은 가장 마지막에 손을 댄 사람이다.
그는 일을 망친 사람이 아니라, 책임이 도착한 사람이다. 떠넘김의 최종 결과는 늘 비슷하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고, 책임은 약한 곳에 착지한다. 조직은 그 착지를 ‘평가’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이 인간을 따로 불러야 했다. 이름이 없으면 우리는 늘 개인을 탓한다.
“왜 저 사람은 일을 못 해?”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이동이다. 책임이 계속 이동하는 조직에서는,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구조 속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은 가장 많이 받는다.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가장 먼저 탄다.
그리고 그 탄 흔적이 ‘무능’으로 기록된다.
당신의 조직에서 책임은 지금 어디에 있나.
누군가의 손에 있나, 아니면 문장들 사이에서 이미 증발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