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알림에 사는 인간
호모 노티피칸스는 라틴어 notificare /ˈnoʊtɪfɪˌkɛər/ *(알리다, 통지하다)*에서 따온 말로,
삶을 ‘할 일’로 사는 게 아니라 ‘푸시’로 쪼개진 조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뜻한다.
Homo notificans /ˈhoʊmoʊ ˈnoʊtɪfɪˌkænz/ 는 그 인간형의 이름이다.
알림은 정보가 아니다. 알림은 리듬이다. 띠링— 하는 순간, 내 시간이 끊긴다.
내 의식은 내 것이 아니라 호출되는 것이 된다. 집중은 길게 쌓이지 못하고, 반응만 짧게 반복된다.
호모 노티피칸스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 ‘뜨는 일’을 한다.
이 유형의 하루는 일정표가 아니라 진동 패턴으로 설계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확인하는 건 컨디션이 아니라 잠금화면이다.
오늘의 목표는 계획이 아니라 ‘미확인’ 숫자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도착한다.
메시지로, 태그로, 멘션으로, 읽지 않은 배지로.
호모 노티피칸스가 사는 세계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상사가 있다.
그 상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알고리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동일하다.
알림은 늘 이렇게 말한다. “지금.”
‘지금’은 폭력적이다. 모든 일을 같은 급으로 만든다.
긴급과 중요, 필요와 욕망, 보고와 수다를 같은 진동으로 처리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우선순위를 선택하지 못하고, 우선순위에 선택당한다.
전형적인 장면은 이렇다.
당신은 일을 하다가, 혹은 쉬다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알림을 받는다.
메신저. “알림”.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캘린더. “15분 후 회의.”
인스타. “OO님이 스토리를 올렸습니다.”
각 알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런데 몸은 똑같이 반응한다.
손이 먼저 가고, 눈이 먼저 따라가고, 마음은 마지막으로 따라간다.
그 순간 당신은 ‘결정’한 것이 없다. 다만 ‘반응’했을 뿐이다.
그래서 호모 노티피칸스는 자주 피곤하다. 많이 해서가 아니라, 계속 끊겨서 피곤하다.
끊김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이 줄면 기준도 줄어든다. 기준이 줄면 삶은 더 쉽게 흔들린다.
결국 알림은 일을 쪼개는 게 아니라, 나를 쪼갠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나의 조각들”만 남는다.
나는 이 인간을 따로 불러야 했다. 우리는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더 정확히는 주권이 떨어진다.
내 시간을 내가 쓰지 못한다. 시간은 나를 쓴다.
알림은 편리함을 약속하지만, 그 대가로 삶의 리듬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리듬이 무너지면, 일도 관계도 쉬는 것도 전부 ‘미응답’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오늘 몇 번이나 ‘내 하루’를 살았나. 아니면 몇 번이나 ‘푸시’를 처리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