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순삭, 조직은 붕괴
1월 12일 첫 출근을 했던 그 주는 정말 긴 일주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들, 정신없이 내려오던 일들.
나는 하루 종일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는 대답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 주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걸려 있었다.
그런데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여전히 용어들은 어렵고, 일은 정신없이 내려오지만 시간만큼은 정말 빨리 갔다.
이상한 일이다. 이해는 늘지 않았는데 속도만 늘었다.
내가 적응한 게 아니라, 내가 밀려도 되는 상태가 된 것 같다.
밀려도 괜찮다는 게 아니라, 밀리는 게 "기본값"이 된 상태.
첫 출근날 받은 업무는 4개였다.한 달 가까이 되자 내 업무는 12개로 3배가 늘었다.
양이 늘어난 것보다 무서운 건, 그 12개가 어느새 ‘내 자리’처럼 굳어버렸다는 점이다.
처음엔 “도와주세요”였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히 "너의 일”이 되었다.
회사는 사람을 훈련시키지 않는다.
그냥 일을 얹고, 얹고, 얹다가 어느 순간 그게 원래 네 일이었다는 듯이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적적동지(敵敵同志). 내 편이 생겼다.
정확하게 아직 내 편은 아니지만, 공동의 적에 대한 연대에 참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꽤 큰 사건이었다.
연대는 호감이 아니라 생존 기술인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는 보통 마음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친해짐’이 시작된다.
그래서였을까.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내 단체톡방이 있는지 물었을 때가 생각났다.
모두가 단호하게 “없다”고 했던 그 방에 오늘 초대되었다. 참 묘하다.
없던 방이 생긴 게 아니라, 있던 방이 이제야 보인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서 왜 그동안 그렇게 단호하게 “없다”고 했던 걸까.
아마 그 방은 ‘정보 공유’가 아니라 소속의 장치라서일지도 모른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다.
반대로 초대받는 순간, 갑자기 존재가 승인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들이 인정하는 일원이 된 걸까.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회사에서 인정은 환영이라기보다 접속 허가에 가깝다는 것.
이제 나는 그들의 속도에 접속했고, 그들의 규칙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더 빨라졌다. 정말 순삭이다. 도망칠 틈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오늘, 그 '접속'과 함께 위기가 같이 내려왔다. 에이스의 휴직, 넘버2의 퇴사.
에이스의 휴직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지만, 넘버2의 퇴사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놈' 때문에 나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놀랍도록 많은 연봉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눈 감고 다니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사기업보다 '널널한' 업무분장, 평균보다 나은 연봉, 돈으로 보상되는 복리후생 등등.
그럭저럭 버티면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조건을 다 내려놓고 다시 사기업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 존재는 상당한 빌런이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놈’ 하나가 아니라 그놈을 보호하는 윗선의 표정이 더 컸다.
문제가 드러났는데도 괜찮다는 듯 넘어가는 표정. 그 표정이 사람을 다시 내몬다.
떠나는 사람은 유난이 아니라 경고인데, 경고를 무시하는 조직은 결국 같은 방식으로 무너진다.
어쨌거나, 결정이 되어버린 이상 돌이키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이제 또 다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일을 몰고 다니는 사나이.’ 이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나의 ‘팔자’로는 이런 회사를 들어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불렀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난 항상 그래왔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회사에서 나를 찾았다. 운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