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0일, 나는 사람이 되었나?
2025년 11월 12일, “두부조림”으로 시작한 브런치가 오늘(2026년 2월 19일)로 100일째가 되었다.
그동안 2만여 분의 ‘프로’ 샘들이 이 허접한 브린이를 찾아주셨다. 숫자만 놓고 보면 가끔 실감이 안 난다.
내가 한 번씩 툭 던져놓은 문장들이 누군가의 손가락을 멈춰 세웠다는 뜻이니까. 그저 감사할뿐이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글을 써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박사과정을 도와주시기로 했던 지도교수에게 느닷없이 거절 통보를 받은 후, 겉으로는 멀쩡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몸이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누구처럼 울부짖지도 못하고, 누구처럼 화도 못 냈다.
그냥 몸이 먼저 무너졌다. 짓밟힌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교수’라는 권력에 대한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게 됐다.
“내가 못나서”라는 자괴가 다시 나를 우울증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걸, 너무 선명하게 인지했다.
비난은 밖으로 뻗지만 자괴는 안으로 파고든다.
밖을 탓하면 분노라도 남는데, 나를 탓하면 남는 건 정지뿐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다.
미화하면 취미고, 사실대로 말하면 응급처치였다.
무언가를 ‘붙잡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대나무숲이었던 브런치는 지금도 재미있다. 물론 브런치의 시스템은 은근히 매듭을 강요한다. “완성된 글”이라는 얼굴을 하고 올라가야 하니까.
그래서 초반에는 10편씩, 가끔 20편씩 이것저것 잡글을 썼다.
매듭을 만들려고 쓴 게 아니라, 매듭을 강요받는 기분이 싫어서 더 많이 썼다.
‘끝’을 내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쓰는 방식으로.
그러다 처음으로 소설도 써 봤고, 시도 써 봤다.
이상하게 글의 장르가 바뀌면 마음도 다른 구멍으로 숨을 쉰다.
산문은 현실을 붙잡고, 소설은 현실을 비틀고, 시는 현실을 압축한다. 무엇이든 좋았다.
중요한 건 내가 다시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기록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목처럼 대놓고 쓰지 못하고 조금씩 숨긴다.
이름을 빼고, 맥락을 흐리고, 시간을 비틀어 사건을 정제한다. 글을 쓰는 순간부터 내 문장을 검열한다.
그 이유는 폭로가 아니라 숨통 때문이다. 하지만 숨통은 너무 크면 오히려 들킨다.
그렇게 되면 내 대나무숲에도 CCTV가 달릴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남기고 싶은 건 사건의 사실관계가 아니라 그날의 감각뿐이다.
왜 숨이 막혔는지, 어떤 표정이 나를 밀어냈는지, 어떤 침묵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지.
그 감각만큼은 내 언어로 남기고 싶다. 그게 내가 지키는 최소한이다.
그리고 오늘, 100일이라는 숫자가 나를 잠깐 멈춰 세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100일 동안 대단한 걸 만든 게 아니라, 대단하지 않은 하루들을 매일 회수해 왔다.
어떤 날은 웃었고, 어떤 날은 씁쓸했고, 어떤 날은 그냥 버텼다.
그런데 그걸 문장으로 남기면 이상하게 ‘하루가 내 것이 되는 느낌’이 든다.
회사의 시간, 불안의 시간, 자괴의 시간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 시간들 사이에서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느낌.
음… 브런치 시작 100일이라는 기념글을 쓰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할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오히려 내 100일답다.
멋있는 결론을 쓰려고 시작한 게 아니라, 멋없는 날을 견디려고 시작했으니까.
기념이라는 건 보통 ‘결론’을 요구하는데, 나는 아직 결론이 없다.
100일은 완성이라기보다 누적이고, 누적은 축하보다 확인에 가깝다.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 무엇을 피해 왔는지, 무엇을 아직도 못 벗어났는지.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간단하다. 나는 아직도 쓰고 있고, 그게 생각보다 나를 살린다.
그리고 찾아와 준 2만여 분의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벌써 100일. 나는 사람이 되었나?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법은 조금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