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삐딱하게
"세상은 1%의 천재들이 이끌어간다."류의 말이 있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삐딱해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1%는 현장을 얼마나 알까?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그래서 교수들이 하는 말은 다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석사시절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수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때부터 '교수의 말'을 의심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들이 전하는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옮은 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제대로 알았다. 아! 교수님이 아니라 왜 교수라고 하는지 불편해하실 분도 있을게다. 하지만, 오늘의 내 컨셉은 '삐딱하게니까'
다시 돌아와서 세상은 1%가 이끄는 게 맞다.
그들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상한 재능으로 세상이 놀랄만한 것들을 만들어 왔다.
그 부분은 인정! 그런데 진짜 궁금한 건 이거다. 그 천재들 중, '게 맛'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책으로 아는 것 말고, 손에 비린내 묻혀가면서 아는 것 말고, "이게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를 몸으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석사까지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그걸 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최소한 사회학은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 외 정치, 행정 같은 학문은 예전부터 그닥 신뢰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책상 앞에서 떠드는 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직이 어쩌구, 행정이 어쩌구 하는 말들은 이미 사회학에서 배웠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세상'을 '현실'을 제대로 알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뜬구름' 잡는 말들이 의외로 많았다.
예를 들면 '행정부담'이라는 말이 그렇다. 시민의 행정부담, 즉 행정절차에 대한 접근성이 향상되면 세상이 더 좋아질까? 이 질문 자체는 좋은 접근이다. 다만 내가 현장에서 체감하는 문제는 따로 있다.
접근성의 확대가 '규칙의 이해'나 '책임의 균형' 없이 진행될 때 그 비용은 고스란히 현장에 떨어진다.
쉽게 말해, 행정접근성이 개선되면 공무원들은 죽어나는 상황이 지금보다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월 20일은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월급'날이다. 이맘때가 되면 관련 공무원들은 정말 바빠진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 지시로 명절 전 13일에 수급비를 보내줬던 때가 있었다.
그걸 '공돈'으로 생각하고 다 써 버린 누군가, 다시 돈을 달라고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때, 그 깽판러는 행정부담 때문에 혜택을 못 받은 걸까? 아니다.
혜택은 이미 받았지만 문제는 접근성이 아니라 이해의 부재였다.
더 삐딱하게 말하면 규칙이 '권리'로만 읽히고 '책임'으로는 읽히지 않는 태도였다.
이런 사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민의 행정 접근성이 좋아지면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그 명제를 현실에 적용시킬 때 필요한 교육, 안내, 기준, 그리고 기준을 지키게 하는 집행 등에 대한 고려가 빠지면 좋은 제도도 현장에서는 그저 '추가업무'로만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책상 앞에서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난 그동안 농촌, 어촌, 전통시장 등을 다니며 직접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결국 비슷했다. '세상은 1%가 다 해 먹는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설계는 위에서 하고, 비용은 아래가 치른다는 구조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파값이, 꽃게값이, 마늘값이 폭락해서 농어민들이 힘들어한다는 뉴스를 자주 듣는다.
그런데 현장에서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점은 '자업자득'인 경우가 많다. 이야기는 늘 '한 장면'만 나온다. 폭락의 결과만 있고, 폭락의 과정은 나오지 않고, 관심도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서 양파를 주로 생산한다고 치자.
그 지역농협이 생산량을 관리하고, 매년 농가에게 대략적인 생산 가이드를 준다. 생산량이 늘면 가격은 떨어지고, 생산량이 줄면 가격은 오른다. 기본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인터뷰해 보면, 이 기본이 종종 무너져 있다.
전년도 가격이 올랐으면, 올해 생산량이 늘어난다. 왜냐하면 작년에 올랐으니까. 작년의 그 값을 받기 위해 농민들은 농협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생산량이 늘어난 순간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격이 떨어지면 농협은 고시한 생산량 외에는 받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농협의 입구는 늘어난 농산물로 막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낫을 든 농민들이 분노한 오크처럼 모여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언론으로 가면 “정부 무능”, “농협 비리” 같은 단어로 정리된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의 빚으로 양파를 사들이는 루트가 반복된다. 그렇게 농촌의 밑 빠진 독은 오늘도 양수기처럼 돈이 빠진다.
어촌도 비슷하다. 내가 처음 연평도에 방문했을 때, 멀리서 마을이 붉은빛을 내는 걸 보고 놀랐다.
가까이 가니 꽃게가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갈매기조차 먹지 않는 꽃게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꽃게값이 떨어져 그대로 버린 것들이었다. 논리는 같다. 작년에 비쌌으니까, 올해도 그 가격을 기대했고, 기대가 무너지면 버린다. 그리고 뉴스는 “어민이 힘들다”로 끝난다.
전통시장도 마찬가지다. 상생법 이후 대기업에서 지역 전통시장에 지원금을 내놓는 구조가 있다.
취지는 좋다. 그런데 돈이 들어오는 순간, 상생의 언어가 ‘내 몫’의 언어로 바뀐다.
지원을 ‘공동의 기회’로 보지 않고, 누군가는 ‘내 돈’처럼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아귀다툼이 난다.
더 적게 받는 누군가는 민원을 넣는다. 그리고 그 민원은 또 다른 행정의 일을 만든다.
그래서 오늘은 삐딱해지고 싶다. 1%가 천재라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 천재들이 만든 구조의 비용을 늘 ‘현장’이 감당하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아서. ‘게 맛’은 결국, 숫자와 명제가 아니라 사람과 과정에 묻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좋은 제도”, “좋은 정책”, “좋은 접근성” 같은 말로 끝낸다.
그 말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말들이 현실에 내려오는 순간, 누가 어떤 비용을 치르는지까지 같이 보자는 것이다. 오늘은, 그걸 말하고 싶어서 삐딱해졌다. 그러다 보니 뭔가 논리적으로 어색하지만 오늘은 삐딱할 거라서 일부러 고치지 않을 예정이다.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