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45

욕값의 외주화

by NaeilRnC

보통의 근로자는 감정노동자다. 물론,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제는 아침부터 도급업체에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욕을 먹고 시달렸다.

문제의 발단은 윗선의 알력과 누군가의 이해관계. 하지만 정작 피해를 보는 사람은 따로 있다. 늘 그렇다.

결정은 위에서 만들어지고, 폭발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폭발을 몸으로 받는 사람은 대개 전달자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뿐이다.”


맞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했으나 약속은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다만 누군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인데, 그걸 대신 전달하는 전달자는 무슨 죄가 있어서 욕을 먹어야 하지?


그러고 보면 월급쟁이들의 일과 중 상당수는 ‘일값’이 아니라 ‘욕값’이다.

흥부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매를 대신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근로자들은 처음에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다음으로 자기계발을 위해서 욕을 먹고 돈을 받는다.

기왕 그럴 거면 돈이라도 더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이 문장을 쓰고 나서도 자꾸 마음이 걸린다.

‘더 받자’는 결론이 너무 순하다. 욕값을 더 받자는 건, 결국 욕을 일의 일부로 인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설계다. 욕이 전달자에게 쏟아지지 않도록, 조직이 감정의 흐름을 설계해야 한다.


감정노동은 “친절”이 아니라 “조절”이다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든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 1983)의 감정노동은 단순히 친절한 태도가 아니다. 임금을 받기 위해 표정과 말투, 심지어 마음의 방향까지 직업 규격에 맞춰 조절하는 노동이다. 감정이 ‘나의 것’이 아니라 ‘업무의 일부’가 되는 순간, 감정은 상품이 된다.

혹실드는 감정노동의 대표적인 방식을 둘로 나눴다. 하나는 표면행위(surface acting)이다. 속은 따로 있는데 겉으로만 웃는다. 다른 하나는 내면행위(deep acting)이다. 아예 ‘원하는 감정’을 실제로 느끼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어제 내가 했던 건 사실 둘 다였다.


상대가 욕을 쏟아낼 때 얼굴은 업무용으로 고정하고(표면행위), 속으로는 “저쪽도 화가 날 만하지” 같은 문장을 만들어내며 나를 달랬다(내면행위). 표면행위는 얼굴이 닳고, 내면행위는 마음이 닳는다. 감정노동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다. “오늘 힘들었다”로 끝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닳았다”로 기록된다.


감정노동은 개인 성격이 아니라 ‘업무 설계’다

모리스·펠드먼(Morris & Feldman, 1996)은 감정노동을 개인의 심리 문제로만 보지 않고 조직이 요구하는 수행 조건으로 정리했다. 감정노동은 네 가지 차원에서 강해진다.

(1) 감정 표현의 빈도, (2) 규칙을 지키는 주의 정도, (3) 요구되는 감정의 다양성, (4)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감정적 부조화(emotional dissonance) 즉, 속과 겉의 괴리다.


도급업체에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일은 이 네 가지가 한꺼번에 높다. 표정은 무너지면 안 되고, 말투는 정중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달래기도 하고 단호해지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핵심은 감정적 부조화다. 나는 결정권자가 아닌데, 나는 ‘결정의 얼굴’로 서야 한다. 이 괴리가 커질수록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눌러서 유지하게 된다.


감정노동은 ‘의지력 예산’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랜디(Alicia Grandey, 2000)는 감정노동을 감정조절(emotion regulation), 즉 자기조절(self-regulation)의 과정으로 본다. 욕을 들으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의지력이라는 자원이 소모된다.

문제는 그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감정노동이 반복되는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예민한가?”라고 자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예민해진 게 아니라, 자기조절 예산이 바닥난 것이다. 바닥난 사람은 더 친절해지는 게 아니라 더 무감각해진다. 무감각은 버티기엔 편리하지만, 오래 살기엔 위험하다. 업무에서 빠져나와도 감정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이 ‘일’로 남으려면,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자프(Dieter Zapf, 2002)는 감정노동 연구를 정리하면서, 감정노동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방식이 단선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같은 표면행위·내면행위라도 직무가 감정을 다룰 재량(자율성/통제)을 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게 중요하다. 어제 내가 겪은 건 감정노동 자체보다, 감정노동을 ‘강제로 떠넘기는 설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네가 가서 말해.” “네가 받아.” 같은 문장은 친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충재 역할을 지시한다. 선택지가 없으면 감정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맞는 역할”이 된다.


감정조절의 비용은 ‘내 마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코테(Stéphane Côté, 2005)는 감정조절의 비용이 개인 내부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다. 감정노동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내가 아무리 감정을 조절해도, 상대가 그 조절을 “약함”이나 “만만함”으로 읽어버리면 그 조절은 진정이 아니라 증폭이 될 수도 있다.


이게 전달자 자리가 망가지는 이유다. 전달자는 자주 정중함을 강제받는다. 그런데 정중함은 때로 상대에게 “더 밀어붙여도 된다”는 신호로 읽힌다. 결국 전달자는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분노의 배수구가 된다. 감정조절은 미덕이 아니라 비용이 된다. 그리고 그 비용은 월급명세서에 찍히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욕값’이라고 부른다.


최전방은 늘 조직의 얼굴이 된다

리프스키(Michael Lipsky, 1980)가 말한 일선관료(street-level bureaucrats)는 정책의 최전선에 서서,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규칙의 얼굴이 된다. 시민은 정책결정자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눈앞의 창구가 국가가 된다.


도급 구조도 똑같다. 상대는 윗선을 만날 수 없으니, 눈앞의 전달자가 회사가 된다. 그 순간 전달자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표면이 된다. 시스템은 욕을 먹지 않는다. 사람이 욕을 먹는다. 그래서 전달자는 조직이 만든 감정의 흐름 속에서 가장 먼저 젖고 가장 먼저 찢어진다.


결론: 욕값을 더 받기 전에, 욕이 흐르는 구조를 끊어야 한다

처음에는 “기왕 그럴 거면 돈이라도 더 받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썼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뀐다. 돈을 더 받는 건 대책이 아니다. 돈은 손해배상이고, 손해배상은 사고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중요한 건 사고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욕이 개인에게 쏟아지지 않도록 조직이 설계를 바꿔야 한다.

폭언이 시작되면 전달자에게 중단 권한을 준다.

악성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의 공식 채널이 받게 한다.

도급·협력 관계에서 “누가 결정했고 누가 설명하는가”를 문서로 고정한다.

감정노동을 ‘서비스 마인드’가 아니라 업무 리스크로 관리한다.


욕을 먹고도 웃는 사람은 강한 게 아니다. 그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 역할이 반복되면, 사람은 언젠가 그 역할만 남는다. 어제 나는 오전 내내 욕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내 월급의 일부가 “욕값”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욕이 아니다. 조직이 그 욕을 정상적인 업무처럼 배치하고 유지한다는 점이다. 욕값이 늘어나는 사회는, 결국 책임이 줄어드는 사회다.


그러니 우리가 더 받아야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해지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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