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사회
분노는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 뉴스는 늘 “우발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발은 원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 참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사이, 살인·살인미수 사건에서 ‘우발적 동기’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내용이 반복된다. 2021년 기준 716건 중 246건(34.4%)이 우발적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 사회에는 ‘갑자기 화내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숫자를 다르게 읽고 싶다. 우발이 많다는 건, 분노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간 분노가 많다는 뜻일 수 있다. 가끔 이런 말도 들린다.
“우리나라는 40대 이상에서 분노에 의한 범죄가 많다더라.”
이 문장을 통계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 ‘분노·우발’ 동기와 연령을 정확히 교차해 보여주는 공개 자료는 제한적이다. 다만 한국의 일부 강력범죄 연령 분포가 서구권에서 흔히 가정하는 ‘젊은 층 집중’ 패턴과 다르게, 중년층 비중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다는 연구는 있다.
그래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왜 나이를 먹을수록 더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까. 왜 나이를 먹을수록 더 오래 참아야만 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존 돌라드(John Dollard, 1939)는 『Frustration and Aggression』에서 좌절은 공격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좌절이 반드시 폭력으로 직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건 이것이다. 좌절은 감정이 아니라 경로의 차단이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경험.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체념.
기대했던 삶이 더 이상 수정되지 않는다는 느낌.
중년 이후의 삶은 선택지가 줄어드는 시기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승진의 문이 좁아지고, 이직은 부담이 되고, 가족의 책임은 늘어난다. 이때 분노는 단순한 화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 통제 상실이 개인의 실패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사회 구조는 보이지 않고, 남는 건 “내가 약해졌나?”라는 자책이다. 자책은 오래 참는다. 그리고 참음은 어느 순간 방향을 잃는다.
테드 거(Ted Robert Gurr, 1970)는 『Why Men Rebel』에서 사람들의 분노는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박탈에서 커진다고 설명했다. 기대했던 삶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분노는 커진다.
한국의 중년은 종종 ‘기대의 세대’였다. 공부하면 올라갈 수 있고, 버티면 나아질 수 있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약속이 흐릿해진다. 임금은 정체되고, 자산은 격차가 벌어지고, 은퇴는 빨라지고, 노후는 불안하다. 이때 분노는 개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깨진 약속의 감정적 잔여물이 된다. 하지만 그 분노는 제도와 구조로 향하지 못한다. 정치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일상의 관계 안에서 맴돈다. 그리고 맴도는 감정은 가까운 곳에서 터진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 1998)는 자기 조절이 소모될 수 있다는 ‘자기 통제 고갈’ 논의를 통해 인간의 통제력이 무한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하루 종일 참는 사람은 저녁에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참음’을 미덕으로 가르쳤다. 직장에서는 웃고, 가정에서는 버티고, 사회에서는 체면을 지킨다.
하지만 참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엔가 저장된다. 참음이 길어질수록, 분노는 억눌린 채 쌓인다. 억눌린 감정은 정의의 방향으로 터지지 않는다. 대개 가장 약한 관계로 향한다. 그래서 분노는 사회적이지만, 폭발은 개인적이다.
마이클 립스키(Michael Lipsky, 1980)는 『Street-Level Bureaucracy』에서 최전선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규칙의 얼굴이 되며, 그 압력을 직접 감당한다고 설명했다.
결정은 위에서 내려오고, 항의는 아래로 쏟아진다. 권한은 없는데 책임만 있는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면, 사람은 점점 자기 안에서 분노를 처리하기 시작한다. 그 분노는 사회 구조를 향해 폭발하지 않는다. 구조는 너무 멀고, 관계는 너무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이런 문장을 본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순간 격분해…”
분노는 사소한 게 아니다. 순간도 아니다. 오래 쌓인 것이다.
우발적 사건이 많아졌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라고 묻기 전에 “왜 그렇게 오래 참게 만들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분노는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압력의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분노를 ‘다스려야 할 성격’으로만 가르쳤을 뿐, 분노가 쌓이지 않도록 환기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법은 잊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규범만 배웠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바꾸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감정은 금지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금지된 감정은 표현의 통로를 잃고, 통로를 잃은 감정은 폭발의 순간만 남는다. 분노가 위험해지는 건 분노가 커서가 아니라, 분노가 지나갈 길이 없어서다.
그러니 필요한 건 “참아라”가 아니라 “흘려보내라”다. 개인에게 인내를 더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감정이 환기될 수 있는 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분노는 도덕으로만 관리되지 않는다.
분노는 개인의 심리에서 시작되더라도, 반복되는 방식은 사회적 구조가 만든다.
권한 없는 책임이 아래로 내려오고 항의는 아래에만 쌓이는 구조
갈등을 개인의 인내로 버티게 하는 조직 관행과 취약한 중재 장치
중년 이후 삶의 경로가 좁아지는 노동시장·복지·돌봄의 결합
상담·치료 접근성이 낮고 “도움 요청”을 수치로 만드는 문화
가까운 관계에서 터지기 쉬운 생활세계의 압력(가정·직장·지역)
분노는 나이를 먹을수록 ‘참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이 참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서 생긴다. 그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언젠가 ‘우발’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청구서를 받게 될 것이다. 분노는 인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구조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