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56

불통의 원인

by NaeilRnC

윗선 아닌 윗선의 압력으로 특정 업체에 용역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런 불합리쯤은 눈감을 수도 있었다. 세상일이 늘 원칙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특혜가 문제가 아니라, 특혜를 받아도 감당 못 하는 업체라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페이퍼 같은 회사에 공사를 맡기라니. 그건 아무리 윗선의 압력이라도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업체의 태도가 정말 짜릿했다.


심지어 업체 대표도 아닌 담당자가 말도 안 통할뿐더러 매우 고압적이었다. 예전 같으면 ‘뭣도 아닌 게’ 하며 속으로 넘겼을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윗선이 불편할 수도 있었기에 참았다.

욕을 해도 참았고, 화를 내도 참았다.


그런데 뭣도 아닌 게 자꾸 소리를 질러댔다. 목소리가 크면 다 이길 수 있다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
“너, 뭐 돼? 학! 씨!”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참았는데 오늘 터졌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회사, 그럼에도 누군가의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이었던 회사.

감히 ‘갑’에게 ‘을’ 질을 하는 회사(아, 이 표현은 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때 내 감정은 딱 그랬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공사 견적서를 받아보고, 가장 낮은 금액의 회사에 일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그 업체에 전화했고, 견적서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뜸 돌아온 말은 이랬다.


“그렇게 되면 나한테 일을 안 줄 수도 있다는 거 아니냐?”


‘당연하지 인마!’라는 소리가 목까지 차올랐지만 뱉지 않았다. 대신 원칙대로 말했다.


“맞습니다.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때 돌아온 건 내용이 아니라 뒷배를 과시하는 말투였다.

“내가 회장이랑 어! 다 해써” 식의.


“네, 그건 저한테 말씀하실 게 아니고요. 지금 이 건 때문에 다른 일도 차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일을 준다면서?”
“선생님, 반말하지 마시구요.”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선생님, 화내지 마시고, 반말하지 마시구요.”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선생님, 반말하지 마시구요.”


이때부터 윗분들이 다가왔다. 상대를 말리러 온 게 아니라, 나를 보러 온 눈치였다. 혹시라도 내가 상대방에게 ‘욕’이라도 할까 봐. 어찌 됐든 나는 그들에게 공무원이니까, 욱하는 순간 훅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계속 같은 말만 했다.


“반말하지 마시구요.”
“소리 지르지 마시구요.”
“원칙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흥분하면 말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정말 화가 나면 오히려 문장이 짧아진다. 긴 설명을 포기하고, 선 하나만 남긴다. 그날 내가 남긴 선은 딱 하나였다.


“반말하지 마시구요.”


결국 통화는 제대로 된 결론도 없이 끝났다. 화를 참다못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하...씨발.


통화가 끊기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입 밖으로 가장 먼저 나온 건 한숨도 논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이 떨렸다. 화가 나서인지, 꾹 참고 있었던 힘이 풀려서인지 모르겠다.


윗분들은 내 눈치를 봤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무원은 감정까지 보고해야 할 것 같은 직업이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단순히 싸가지 없는 업체 한 곳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회사가 아니라, 그 회사가 저렇게 굴어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였다.

말이 안 통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상대가 무식해서도, 내가 설명을 못 해서도 아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나는 굽힐 필요가 없다”라고 결론 내린 사람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화는 조율인데, 조율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말은 그저 상대를 밀어붙이는 소음일 뿐이다.


그러니까 불통의 원인은 ‘말’에 있지 않다. 말은 이미 끝난 뒤에 등장한다. 불통은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뒷배를 믿는 순간, 원칙은 협의 대상이 아니라 귀찮은 절차가 된다. 절차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설명을 싫어하고, 설명을 싫어하는 사람은 결국 소리를 지른다.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논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논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상대와 싸운 게 아니라, 사실은 구조와 잠깐 통화한 것 같았다.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해줄 사람은 있다는 믿음.
원칙은 몰라도 통하는 라인은 있다는 자신감.
실력은 없지만 태도는 고압적인 이상한 구조.


생각해 보면, 이런 장면은 늘 비슷하다. 일은 모르는 사람이 자신감은 제일 넘치고, 실무는 아는 사람이 제일 조심스럽다. 책임은 질 생각이 없는 사람이 제일 큰소리를 내고, 나중에 감사나 문제 발생이 무서운 사람은 끝까지 말을 고른다. 그래서 불통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예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권력 배치의 문제다.


누가 굽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 누가 결과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지, 누가 실수를 해도 보호받는지.
그 질서가 이미 정해져 있으면 말은 처음부터 통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그걸 다시 배웠다.

불통의 원인은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알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순간, 사람은 가장 먼저 목소리부터 높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실무자는 오늘도 문장을 짧게 줄인다.

“선생님, 반말하지 마시구요.”

"하...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