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것들
배경 : 한때는 혜화동에 사는 게 꿈이었다. 혜화사거리 아남아파트 일대에는 홈플러스와 롯데마트, 개인 마트까지 할인매장이 4곳이나 있어서, 장을 볼 때마다 ‘이득을 본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여자친구와 자주 가는 동네 마트가 있다. 그곳에서는 술안주를 말도 안 되게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신선식품은 시간이 갈수록 저렴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떨어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까지 그녀와 나의 유일한 낙은, 구리의 한 순두부집에서 순두부찌개와 두부부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맞은편의 24시 마트를 알게 되면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저렴한 행복으로 채워졌다. 늦은 밤에 가면 육회·육사시미는 물론 오징어볶음과 순대볶음까지 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특히 동결건조 딸기는 100g에 5,500원이었는데 - 난 이게 그렇게 싼 가격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 품질 좋은 상품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저렴하게 놓여 있는 그곳은, 우리에겐 왕복 30분을 감수하고도 찾아갈 만한 ‘작은 보물창고’였다. 하지만 마트 입장에서는 손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품이 이렇게 싸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신선식품의 유통기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기보다 ‘싸게라도 파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세상은 이렇게 정(正)과 반(反)이 합(合)을 이룬다. 상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낮아지고, 우리는 그 덕분에 ‘가성비’라는 새로운 행복을 소비한다.
아무리 저렴한 상품이라도, 직접 만들어 먹는 것보다 싸기는 어렵다. 특히 두부부침과 계란말이는 집에서 만들면 그 어떤 마트 가격도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요리에 도전했다. 두부부침은 성공적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네 번 돌려 수분을 빼고, 약불로 천천히 굽자 놀라울 만큼 바삭하고 고소한 두부부침이 완성되었다. 문제는 계란말이었다. 스테인리스 팬은 유난히 계란말이에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우리는 계란말이로 시작해 스크램블로 끝나는 밤을 여러 번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계란말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한 남자가 나왔다. 과거에도 요리 프로그램에서 종종 솜씨를 드러냈던 그는, 최근에는 아주 무거운 책임을 지는 사람들 앞에서도 직접 계란말이를 만들어 대접했다고 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불현듯 24시 마트의 유통기한 임박 상품들이 떠올랐다.
공적인 역할에 누구보다 철저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적 영역에서의 ‘잔여 한 친절’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은 신선함을 잃어가며 할인 코너로 옮겨지는 식재료와 닮아 있었다.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상품만이 아니다. 태도와 품격도 유통기한을 갖는다.
취두부는, 흔히 ‘썩은 두부’라고 오해받지만 사실은 발효의 정수(精髓)다. 부패와 발효 사이의 아주 미묘한 경계에서 완성되는 음식. 그리고 그 경계는 사람의 취향과 판단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지옥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냄새가 심한 음식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한 시대의 권력자는 이 취두부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극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최애 음식이었던 셈이다. 이 아이러니가 말해주는 건 단순하다.
가치는 절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누가,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취두부처럼 리더의 행동 역시 ‘인간적인 배려’와 ‘지나친 사적 사용’이라는 매우 얇은 경계 위에 놓여 있다. 신선도가 떨어진 식재료를 아깝다고 다시 살릴 수 없듯, 리더의 염치가 공동체의 상식이라는 마지막 유통기한을 넘기는 순간 그 가치는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지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더 깊어지는 숙성으로 평가받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렴해지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는 결국 ‘맛이 간 최초의 역사’로만 남게 된다.
나는 다시 계란말이를 좋아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바란다. 어떤 자리든, 어떤 직함이든 갈수록 저렴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갈수록 품격이 깊어지는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