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지금은 14:30.
사무실에서 몰래 쓰는 일기도 쫄깃하지만, 오늘 오전이 더 쫄깃했다.
내 평균 출근시간은 오전 8시 10분. 나의 상급자들도 8시 20분 전후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9시부터 나의 일이 쏟아진다. 스콜(squall)이다.
느닷없이 본인의 머리 속에 가득 담긴 구상을 뱉어내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시킨다.
그러면 나는 혼자 끙끙거려야 한다. 그런데 난 혼자 끙끙거릴 여유가 없다.
당장 3월에 시작해야 하는 공사가 2건, 3월 내에 끝내야 하는 행사가 4건이다.
3월에 시작해야 하는 공사의 계획도 아직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 떨어진 오더는 이것이었다.
“특별강사의 강의 프로그램을 짜라.” 뚜둔.
강의 프로그램이라. 보통 이런 말은 참 간단하다.
“프로그램 하나 짜봐.”
하지만 그 말 속에는 강사 섭외, 시간 구성, 강의 내용, 예산, 장소, 일정, 참가자, 홍보, 결과보고까지
온갖 것들이 조용히 들어 있다. 마치 작은 가방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 여행용 캐리어가 나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오전 내내 컴퓨터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공사 계획인가, 행사 준비인가, 아니면 강의 프로그램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아, 이건 선택지가 아니구나. 그냥 다 하는 거구나.
그래서 나는 일단 문서를 하나 열었다.
“특별강사 프로그램(안).hwp”
그리고 한참을 바라봤다. 문서는 비어 있고, 내 머리도 비어 있었다. 그래도 뭐라도 적어야 한다. 그래야 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서 첫 줄을 작성했다.
“추진배경”
이 네 글자는 참 대단하다.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 때도 일단 일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해준다.
그렇게 흰 종이에 ‘추진배경’을 띄워놓고 무작정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좋을까. 누굴 불러야 그럴듯해 보일까.
그때 갑자기 결재를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지르면 어쩌라는거지? 사람이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죽는 편이 낫다.
그런데 전화가 빗발친다. 행사 담당자를 찾는 전화다. 다행히도 전화는 나에게 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걸려왔다. 나는 조용히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결재 준비 중이라 나중에 전화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을 먹은 뒤 결재를 위해 본청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결재는 지난번에도 한 번 받았던 것이다. 급하게 만든 일정이라 그런지 일별 계획과 예산이 다시 수정되었다. 그런데 최종결재권자께서 2시 결재를 돌연 취소하셨다.
아, 이럴 거면 시간이라도 조금 더 주지. 매번 이런 식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얘기했던 강의주제와 일정은 어떻게 됐지?”
“지난번에 말했던 계획은 이번 주 중에 결재 받을 수 있는 거야?”
“우리 4월 말까지 끝내려면 이번 주부터 계획이 돌아가야 하는데…”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찾으세요.
그때 시각 14시 30분.
오전에 주어진 업무는 아직 제자리이고, 그동안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도 아직 제자리다.
돌고 돌아 제자리. 순간 시지프스의 형벌이 떠올랐다. 그리고 친구의 말도 생각났다.
“니가 그럼 그렇지.”
하지만 괜찮다. 아직 오후가 남아 있고, 상급자들의 머리 속에는 아마 또 다른 구상이 자라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어떤 내용이 바뀔지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몰래 메모장을 열어 일기를 계속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시각 19시 5분. 일은 끝나지 않았고, 일기도 끝내지 못했고, 일을 시킨 누군가는 퇴근을 해 버렸다. 보고를 하려 해도 대상이 없다. 크. 이런 게 회사생활이지.
내일은 또 아침부터 폭풍이 몰아칠 것 같다. 매일 폭풍이 몰아쳐도 내가 체념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여전히 반골의 기질을 부려야 할까. 고민이다.
이미 나의 방향은 이곳에서 정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일을 죽어라 시키는데 설마 자르기야 하겠나.
묻고 더블로 갈지, 못 먹어도 고일지, 아니면 여기서 스톱일지. 문제는 나의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