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61

폭풍 전 고요

by NaeilRnC

고요하다. 왜지? 어떤 행사든 당일은 바빠야 하는데 오늘 이곳은 유난히 오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고요하다. 금요일이라는 특수성 때문인가? 아니면 저 멀리 폭풍은 나에게 오지 않고 그냥 지나갈 것인가?

잘 모른다는 건 늘 불안감을 동반한다. 그리고 불안감의 크기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나에게는 조력자가 없다. 담당자는 오늘 휴가다. 모두가 이렇게 발을 뺐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이쪽의 일은 생각보다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오늘 행사의 원래 참석자는 상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점포를 닫고 행사에 참석하라는 일정부터가 일단 에러이다.


어떤 이는 시간당 매출이 달라질 수 있고, 어떤 이는 저녁에 일을 하기 때문에 낮시간에는 참석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괄적으로 3시부터 5시까지 일정을 잡고 통보하는 일이 내 상식에는 좀 의아했다.


두 번째, 오늘 행사의 원래 참석자가 불참일 경우 대체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 대체자에게 나름의 편의를 제공한답시고 주차권을 준다고 한다. 이럴 경우 사전에 협조를 위한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차량번호를 미리 알아야 하는데, 이건 당사자가 알려주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이런 사정을 설명하면 돌아오는 말이 대개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럼 좀 알아보세요.”
“유도리 있게 하셔야죠.”
“그런 건 현장에서 해결해야죠.”


참 쉽다. 모든 말은 늘 한 문장으로 끝난다. 알아보세요. 유도리 있게 하세요. 현장에서 해결하세요.

하지만 현장에는 마법이 없다. 없는 차량번호가 갑자기 생기지도 않고, 장사를 해야 하는 상인이 갑자기 한가해지지도 않는다. 누군가 점포 문을 닫고 와야 하는 문제는 “협조 부탁드립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건 실무자 하나다.

설명도 내가 해야 하고, 전화도 내가 돌려야 하고, 안 되는 이유도 내가 듣고, 그럼에도 somehow 되게 만드는 것도 결국 내 몫이다. 그래서 조용한 지금이 더 불안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 일도 터지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대체로 시작 직전에 생긴다.


누군가는 갑자기 못 온다고 하고, 누군가는 주차가 안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왜 이런 시간을 잡았느냐고 따진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은 아주 공평하게 내게 도착한다. '담당자의 휴가'. 그 사실이 오늘따라 참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일은 남아 있고, 행사는 예정되어 있고, 설명은 필요한데 정작 원래 맡았던 사람은 없다.


이럴 때 조직은 늘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는 하겠지 하는 표정.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다. 그래서 지금의 고요는 평화가 아니다. 잠깐 숨을 고를 시간도 오늘은 없다. 그저 아직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아마 잠시 후 누군가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 어떻게 됐어요?”
“대체 참석자 확인됐어요?”
“주차권은요?”
“행사 시작 전에 다 정리되는 거죠?”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다. 결국 또 somehow 되긴 될 것이다. 누군가는 늦게 오고, 누군가는 투덜대고, 누군가는 끝까지 협조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행사는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끝나면 사람들은 말하겠지.


“고생하셨어요.”


행사는 3시부터인데 나는 1시부터 바빴다. 원래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던 다목적실이 대관신청 때문에 못 쓰게 되었다고 했는데, 12시에 자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원래대로 그냥 다목적실에서 진행했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담당자는 휴가다. 이럴 때 휴가는 보통 “엿 드세요”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의 내 기분은 그랬다. 나는 이 회사에서 행사를 치러본 적이 없다. 그 말은 다목적실 세팅을 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오늘의 설명회는 업체의 PT와 내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연습도 못 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물날 뻔했다. ‘그놈’은 원래 자기 일이었음에도 마치 임원처럼 체크만 하고 있다. 국장님은 오늘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게 이 일뿐인지 아침부터 계속 쪼아댔다. 팀장님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만. 유독 나만 바빴다.


예전 회사에서는 이런 행사가 있으면 경리팀이 알아서 일을 도와줬던 것 같은데, 그게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모든 회사가 여기처럼 경리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서류도 챙겨주지 않고 뒤에서 훈수질만 하는 게 정상인 건가 헷갈렸다. 하긴,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조직이니 모든 걸 내가 혼자 알아서 잘 눈딱깔센 해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순간 삔또가 상했다.


될 대로 되라지. 국장님이 물어봐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설명회. 어떻게든 되겠지.

에라이. 나만 빼고 다 엿이나 먹어라.


잠깐의 상상 끝에 눈물이 날 뻔했다. ‘하, 이따위게 뭐라고 눈물이 날 것 같지?’. 순간 내 자신이 찐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했다. 뛰어다녔더니 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걸 본 국장님이 말씀하셨다.


“대리님, 물 사와야지.”
“대리님, 대표님 인사말씀은 서류철에 넣어와야지.”
“대리님, 사람이 더 올 수도 있으니까 책상과 의자 옮겨야지.”
“대리님, 발표자료는 다 준비 된 거예요?”
“대리님.”, “대리님.”, “대리님.”


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잉여가 될 것이다. 미친놈처럼 뛰어다녔다. 2층 계단을 20번은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시작된 집합 타임.


‘그놈’은 지가 사장인 것처럼 느긋하게 내려와 나에게 지시했다.

“눼에눼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업체의 설명이 끝났고, 내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오늘의 자리가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고, 선진지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와야 하는지 숙제를 내줬다.


하... 하얗게 불태웠어. 이제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