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을 ‘한국의 승리’라고만 부르기엔 찜찜한 이유
코리안 데몬 헌터스가 오스카를 받았다. 장편애니메이션상. 그리고 주제가상.
언론은 “한국문화가 또 해냈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은 K-pop을 전면에 내세웠고, 한국적 미감과 한국계 창작진, 한국 대중문화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찜찜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국이 만든 한국 콘텐츠라기보다 미국 시스템이 만든 한국형 콘텐츠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우리는 자꾸 소재의 국적과 자본의 국적, 정서의 국적과 시스템의 국적을 한 문장 안에 섞어 말한다.
한국적 소재가 세계적 승인을 받은 것과 한국의 제작 시스템이 세계적 승인을 받은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44)는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서 “Amusement under late capitalism is the prolongation of work.”라고 말한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오락은 노동의 연장이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핵심은 간단하다. 문화는 더 이상 자생적인 감동의 영역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조직되고 유통되는 체계라는 것이다. 무엇이 세계적으로 보이는가, 무엇이 상을 받는가, 무엇이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는가는 작품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작품을 누가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포장하고, 어떤 시스템을 통해 세계에 내놓느냐가 같이 작동한다.
코리안 데몬 헌터스가 바로 그 사례다. 한국적 소재와 감각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오스카가 알아듣는 언어로 번역하고,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확산시키고, 시상 체계까지 밀어 올린 것은 넷플릭스와 소니라는 미국 산업 시스템이다.
허버트 실러(Herbert I. Schiller, 1976)는 『커뮤니케이션과 문화 지배』(Communication and Cultural Domination)에서 “a period of growing cultural-communications struggle”라고 표현한다.
이는 “점점 더 커지는 문화-커뮤니케이션 투쟁의 시기”라는 뜻이다.
실러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문화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누구의 문화를 세계 표준으로 조직하고 유통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지배의 문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한국문화가 세계에서 통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한국성이 미국 기업의 자본과 플랫폼을 통과할 때 더 쉽게 세계적 승인을 받는가이다.
코리안 데몬 헌터스는 한국적 상상력이 세계에서 먹히지 않아서 성공한 게 아니다. 반대로, 이미 먹히는 것을
미국 시스템이 가장 효과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79/1984)는 『구별짓기』(Distinction: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에서 문화적 취향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그의 논지를 정리하면 문화에는 그것을 ‘고급’으로 승인하는 위계와 작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세계적인가, 무엇이 수준 높은 문화인가, 무엇이 인정받을 만한 작품인가. 이건 작품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승인하는 권위의 장(field)이 따로 존재한다. 오스카는 바로 그 장이다. 그래서 코리안 데몬 헌터스의 수상은 단순히 “좋은 작품이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미국 중심의 문화 승인 시스템이 이 작품에 ‘세계적’이라는 작위를 부여했다는 의미다.
이 작품은 분명 성과다. 한국적 코드가 더 이상 변방의 소재가 아니라는 것, K-pop과 한국적 감각이 글로벌 문화의 중심에서 소비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한국적 소재는 세계적이다. 하지만 그 세계성을 승인하는 시스템은 아직 미국이다.
이 차이를 흐리면 안 된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한국적 이야기는 한국 기업이 만들 때보다 미국 기업이 만들 때 더 쉽게 세계의 표준이 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적 상상력은 이미 세계적인데, 그 세계성을 승인받는 통로는 여전히 미국이 더 많이 쥐고 있는가.
이 질문은 국뽕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제 한국문화는 “인정받을 만한가”를 묻는 단계를 지났다.
이제는 누가 그것을 만들고, 누가 그것을 유통하고, 누가 그것을 ‘세계적’이라고 선언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코리안 데몬 헌터스는 분명한 한국문화의 성과다. 그리고 동시에 구조를 드러낸 사건이다.
한국의 얼굴은 이번에 세계를 제대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 얼굴을 오스카까지 데려간 시스템은 미국이다.
그래서 “한국문화의 성과”라는 문장을 말하기에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한국의 얼굴은 이미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얼굴을 남의 시스템에 태워 보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 시스템으로 끝까지 데려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