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규칙과 배제
언젠가 ‘그놈’이 “맛집은 불친절하다, 깨끗하지 않다, 비싸다”라고 지껄이던 헛소리가 떠올랐다.
그놈의 기준에서 이 집도 맛집에 들어가는 걸까.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맛집은 그놈의 맛집과 다르다. 맛집이 불친절한 이유를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불친절한 식당은 아무리 맛이 있어도 결국 망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식당은 손님이 있어야 운영되는 곳이지, 음식을 위해 손님이 존재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당이 깨끗하지 않다면 아무리 맛있어도 장사를 하면 안 된다. 음식은 결국 사람이 먹는 것이다.
비싸야 맛집이라는 생각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맛집에서 중요한 건 대개 가성비다.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맛있는 척하는 음식’을 먹을 이유는 없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맛집은 맛뿐 아니라 가격까지 납득 가능하다.
결국 그놈의 맛집론은 나에게 그저 헛소리였을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미지 속 중국집을 보자.
혼자서 드실 때 2인분 값을 쓴다. 2인분을 다 먹는다. 친구를 부른다. 다음에 아내와 온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외로움을 팔지 않습니다. 혼자 오지 마세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밥 먹으러 갈 수밖에 없는 사람한테 친구를 부르라니.
아내와 오라니. 이건 혼자 밥 먹으러 식당을 찾은 사람에게 무려 세 번이나 상처를 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집이 맛집일리가 없다. 내가 아는 맛집들은 혼자라고 차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집은 대체 무슨 “깡”으로 저따위로 장사를 하는 걸까.
겉으로 보면 저 문장은 농담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도 저걸 웃긴 안내문 정도로 소비한다.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 보면, 저 문장은 식당의 유머가 아니라 식당의 선별 기준에 가깝다.
저 식당이 상상하는 '정상적인 손님'은 혼자가 아니라 둘 이상이다. 혼자 온 손님은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이 미리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공간이 된다.
우리는 흔히 식당을 음식을 먹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 사무실은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은 그렇게 중립적이지 않다. 어떤 공간은 노트북을 오래 쓰는 손님을 싫어하고, 어떤 공간은 조용히 있어야 할 사람과 시끄러워도 되는 사람을 나누고, 어떤 공간은 혼자 온 사람을 아예 정상적인 이용자 범주에서 밀어낸다.
공간은 늘 보이지 않게 말한다. “이곳의 손님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당신은 여기 어울리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74)는 『The Production of Space』(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을 단순히 비어 있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르페브르에게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행동은 자연스럽게 만들고 어떤 행동은 어색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질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저 중국집의 안내문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저 식당은 이미 자기 공간을 그렇게 생산하고 있다. 둘이 와서 나눠 먹는 손님, 여럿이 와서 떠드는 손님, 즉, ‘혼자가 아닌 손님’을 정상적인 이용자로 상상한다. 반대로 혼자 온 손님은 어쩌면 매출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공간이 기대한 풍경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저 문장은 가격 안내도 아니고 좌석 운영 안내도 아니다. 저건 사실상 공간의 헌법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문화이론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1980)는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일상생활의 실천)에서 “공간은 실천된 장소(space is a practiced place)”라고 설명한다.
장소는 단순히 건물과 구조물이지만, 공간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누구를 받아들이며 누구를 밀어내는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식당이라도 누구에게는 편한 공간이 되고, 누구에게는 들어가기 어려운 공간이 된다. 결국 공간은 건물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규칙을 따르는 사람과 규칙에서 밀려나는 사람이 함께 만든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63)은 『Stigma: Notes on the Management of Spoiled Identity』(스티그마: 훼손된 정체성의 관리에 관한 노트)에서 정상인과 낙인찍힌 사람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시선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정상인과 낙인찍힌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관점(perspective)이라고 말했다.
이걸 저 안내문에 대입하면 구조가 훨씬 선명해진다. 혼자 온 사람이 원래 문제인 것이 아니다. 식당이 그를 문제적인 손님으로 보도록 만드는 관점을 먼저 깔아 두는 것이다. 즉 혼밥 손님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혼밥 손님을 이상하게 만드는 시선이 먼저 존재하는 셈이다.
그래서 저 문장은 웃기기 이전에 무례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례함을 유머로 위장하고 있다.
“외로움을 팔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은 재치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식사 행위를 결핍의 징후로 바꾸어 버린다. 혼자 먹는 사람을 배고픈 손님이 아니라 외로운 인간으로 다시 정의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식당은 메뉴를 파는 곳이 아니라, 손님의 사회적 형태를 심사하는 곳이 된다.
물론 식당 입장에서는 변명할 수 있다. 혼자 오는 손님은 회전율이 떨어진다, 테이블 효율이 낮다, 메뉴 구성상 2인 기준이 더 맞는다.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부 사정이지, 손님을 조롱할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런 사정을 유머처럼 내걸면서 “혼자 오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식당은 솔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박해진다. 장사란 손님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손님을 맞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저 집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저 집은 맛집이 아니라, 손님을 고르는 집일지도 모른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돌아온다.
공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손님이 음식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음식이 손님을 위해 존재하는가.
저 중국집의 안내문은 그 질문 앞에서 너무도 솔직하다.
“우리는 이런 손님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더 노골적으로 번역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손님을 고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저곳은 더 이상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누군가를 환영하고, 누군가를 밀어내고,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회적 공간이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대개 음식보다 먼저, 자기 오만 때문에 망한다.
맛있는 음식은 손님을 시험하지 않는다. 진짜 맛집은 손님의 숫자를 재기 전에 손님의 배고픔을 먼저 본다.
혼자 왔는지 둘이 왔는지, 연인이랑 왔는지 친구랑 왔는지, 그런 건 음식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혼자 왔다고 차별받는 식당이라면, 그 집은 맛을 팔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들만의 질서를 팔고 있는 것이다.
장사는 결국 사람이 오가야 한다. 일방통행이 되는 순간, 그 공간은 식당이 아니라 규칙만 남은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