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것
8시에 퇴근했다. 비가 오는 걸 보니 오늘은 소주각이었다.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퇴근길이지만, 오늘은 그 길을 걷으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 버스를 탔다. 비 오는 날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직장인에게는 대개 그보다 먼저 피로를 떠올리게 한다. 젖은 공기, 축 처지는 몸, 늦어진 퇴근. 거기에 하루 종일 머리를 쓴 날이면 비는 분위기가 아니라 압박처럼 느껴진다.
버스에 앉자마자 쿠팡이츠로 안주를 찾았다. 이런 날은 곱창에 소주다. 그런데 자주 시켜 먹던 곱창집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돼지곱창골목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곱창을 먹어왔다. 곱창은 내게 거의 소울푸드다. 그런데 오늘처럼 소울이 바닥난 날, 정작 곱창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은 괜히 더 서러웠다. 사람은 원래 정말 큰 일보다, 사소한 것이 어긋났을 때 더 허무해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 근처 마트로 갔다. 오늘은 결단코 소주를 까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냉장코너를 훑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아, 먹을 게 없다. 오늘 왜 이러지.'
결국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콜라를 땄다.
'그래. 너라도 있어 다행이다.'
나는 오늘 문서 6개를 작성했다. 2차 추경안, 추진계획 3개, 만족도 조사결과 보고서, 그리고 사업을 마무리하는 결과보고서. 그 정도면 꽤 많이 한 날이다. 그런데도 할 일은 줄어든 느낌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업무는 끝나는 게 아니라 밀려 있을 뿐이고, 내가 처리한 것은 완료가 아니라 잠깐의 소거에 가깝다.
도저히 더는 못 하겠어서 그냥 나왔다. 지금의 텐션으로는 앉아 있어도 제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팀장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 일일업무보고에 그 내용이 뭐야?”
몇 주 전 본청에서 연락이 왔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 스트링라이트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설치할 수 없는 곳이니 의견을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화는 대개 의견을 묻는 형식을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공을 넘기겠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예산도 없고, 장소도 애매하고, 더구나 모텔 밀집구역에 밝은 등을 설치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도 의문이라고 답변했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과에서 연락이 왔다. 최근 민원을 검토하다 보니 점용허가를 받았다는 서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류가 없으면 불법시설이고, 불법이면 철거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 내가 오기 2년도 훨씬 전에 설치한 시설물의 증빙자료를 대체 지금 어디서 찾나.'
일단 전화를 끊고 팀장님께 보고드렸다. 팀장님은 알았다고 하셨다. 별일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자료를 찾았고, 세부적인 내용은 관련 부서에 요청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내용을 일일업무보고에 적었다. 그런데 국장님이 그걸 보시고 왜 자기한테 먼저 보고하지 않았느냐며 난리를 치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빠졌다. 하루 종일 문서를 여섯 개나 쓰고, 밀린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문제 상황도 보고했는데 남는 것은 피로와 지적뿐이다. 이 바닥에서는 일을 했느냐보다 누구에게, 어떤 순서로, 어떤 톤으로 보고했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내용보다 결재선이 앞서고, 해결보다 형식이 우선한다. 그리고 실무자는 늘 그 사이에서 욕을 먹는다.
윗선은 왜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묻고, 옆 부서는 왜 아직도 정리가 안 됐냐고 묻고, 실무자는 이미 퇴근한 버스 안에서 그 모든 질문의 접점이 된다. 비가 오면 원래 생각나는 게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추억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사랑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오래된 노래를 떠올린다.
그런데 오늘 내가 비를 보며 떠올린 것은 곱창도, 소주도, 낭만도 아니었다. 보고는 위로 올라가고, 책임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젖는 사람은 늘 실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