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77-2

맞네, 그저 그런 하루?

by NaeilRnC

오늘 점심은 홍콩반점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Y를 비롯한 여직원들이 단체로 점심을 굶고 있었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혼자 짬뽕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짬뽕은 괜찮았다. 문제는 국물이었다. 흰옷에 세 방울이 튀었다. 아.

이런 날은 꼭 별것 아닌 게 더 거슬린다. 세 방울이면 닦으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그런 사소한 얼룩이 하루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밥을 먹으면서 아반샘의 글을 읽었다. 그냥 별것 아닌 이사 이야기였다. 그런데 남의 평범한 일상을 읽다가, 문득 내 쪽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을 좀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잘난 놈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내 눈에는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실력보다 허세가 먼저 보이고, 말보다 빈틈이 먼저 보이고, 간판보다 그 안의 공허가 먼저 보였다.


이 회사 국장님도 사실 내게는 별거 아니다. 대기업 임원 출신이면 뭐 하고, 서울대 박사면 뭐 하나. 그 타이틀이 내 월급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내 업무를 덜어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같이 일해보면 사람이 어떤지는 명함이 아니라 몇 마디 말과 몇 번의 결정에서 드러난다.


‘그놈’과 국장님은 둘 다 박사 출신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처음 왔을 때 ‘그놈’이 나를 보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그 눈빛은 충분히 말했다.


‘박사생 찌끄레기.’


사람은 참 우습다. 그딴 시선 하나에도 자존심이 긁힌다. 내가 박사과정에 진학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박사 따위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짜증 나서였다. 그렇게 진학을 했는데 난 지금 수료까지 1학기를 남겨두고 여기 앉아서 영수증이나 정리하고, 문서나 고치고, 직원들 눈치나 보며 하루를 버티고 있다.

학위는 아직 멀고, 현실은 너무 가깝다.


오후의 일과는 대충 정해져 있다.

1. 오전에 탈곡당했던 추진계획 수정 및 보완

2. 오전에 탈곡당했던 추경예산 설명서 수정 및 보완

3. 오전에 탈곡당했던 의견수렴 결과 보고서 수정 및 보완

4. 오전에 탈곡당했던 환경개선사업 추진계획서 수정 및 보완


적어놓고 보니 전부 같은 일이다. 오전에 한 번 탈곡당하고, 오후에 다시 주워 담는 일.

이쯤 되면 업무라기보다 의식에 가깝다. 문서를 쓰고, 털리고, 고치고, 다시 맞추는 반복.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보기 좋은 문장인지, 누가 듣기 편한 표현인지, 누가 불편하지 않을 방식인지까지 다 맞춰야 한다. 여기서 문서는 생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조직 내 생존 도구에 더 가깝다. 지겹다.


반복되는 문서작업도, 반복되는 수정도, 반복되는 지적도. 나는 그동안 정책을 기획하는 일을 해왔다. 어떤 정책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어떤 정책은 지금도 잘 굴러가고 있다. 적어도 내가 하던 일에는 방향이 있었고, 설계라는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끔 내가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문장을 다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방향을 짜는 게 아니라 윗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 실무자라기보다 완충재 같다.


그래서 더 허무하다. 짬뽕 국물 세 방울. 별것 아닌 이사 이야기. 박사 타이틀. 오전에 털린 문서 네 개.


오늘 하루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전부 사소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더 빨리 닳게 만든다. 거창한 실패는 차라리 각오라도 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런 식의 자잘한 소모다.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분노하기도 민망한데 사람을 계속 깎아내리는 것들.


맞다. 오늘도 그저 그런 하루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더 피곤하다. 그 와중에 Y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고인 물. 내로남불이 당당한 똥. 덩. 어.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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