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보지 않으면 구경거리가 된다.
존경(Respect)은 라틴어 respectus에서 유래했다. 이는 re- (다시, 뒤로)와 specere (보다)의 결합으로, “뒤돌아보다”, “다시 보다”, “주의 깊게 고려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반면 spect는 독립된 단어라기보다 ‘보다’라는 의미의 어근이다. spectacle은 구경거리, spectator는 관객이라는 뜻을 가진다.
결국 respect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보고, 한 번 더 생각하며 바라보는 태도다. 문제는 이 re가 빠질 때 시작된다.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건 그냥 보는 것(spect)이다. 이 차이를 놓치는 순간, 사람은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구경거리가 된다.
요즘은 사람이 아니라 장면이 먼저 소비된다. 누군가 실수하면 이해보다 촬영이 먼저고, 누군가 무너지면 위로보다 공유가 먼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보고도 멈추지 않는다. 한 번 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보지 않는다. 이미 re는 빠져 있다. 남는 건 spect뿐이다.
가이 드보르(Guy Debord, 1967)는 『The Society of the Spectacle』(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은 단순한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로 매개된 인간 관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지금의 현실에 그대로 가져오면 더 선명해진다. 우리는 사람을 직접 보지 않는다. 이미지로 본다. 영상으로 보고, 짤로 보고, 캡처로 보고, 댓글로 판단한다. 그래서 관계는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형성된다. 이때 사람은 사라지고 장면만 남는다. 그리고 그 장면은 소비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respect는 무너진다. 다시 보지 않는 순간, 관계는 끊긴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59)은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자아 연출 이론)에서 인간을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는 보여지는 존재다. 문제는 지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연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붕괴를 소비한다. 실수, 실패, 당황, 무너짐. 이런 장면일수록 더 빠르고 더 강하게 퍼진다. 그리고 그 장면 앞에서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본다. 이건 관찰이 아니라 선택이다.
존경은 가까이 가려는 태도다. 이유를 보려 하고, 맥락을 이해하려 하고, 한 번 더 생각하려는 태도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반대로 구경은 멀어지는 태도다. 안전한 거리에서 보고, 판단하고, 소비하는 태도다. 그래서 즉시 가능하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re는 사라지고 spect만 남는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의 고통은 콘텐츠가 되고, 누군가의 실수는 웃음거리가 되고, 누군가의 실패는 평가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사람이다. 장면은 남고, 사람은 사라진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플랫폼의 문제도 아니다. 시선의 문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보지만, 점점 덜 이해한다. 점점 더 빨리 소비하지만, 점점 더 늦게 생각한다. 그래서 존경은 줄어들고, 구경은 쉬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대상이 아니라 재료가 된다.
respect에서 re가 빠지면 spect가 된다. 이건 단어의 변화가 아니라 구조의 변화다.
다시 보지 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존경받지 못한다. 사람을 구경하는 사회는 결국 사람을 쓰고 버린다. 그리고 그 끝에서 누가 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람을 계속 구경하는 사회는 결국 사람을 닳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회는 반드시, 언젠가 나를 구경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