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값싼 안심의 비용

고아원 가기 전 짜장면과 털어내기 전 반등

by NaeilRnC

어렸을 때 고래를 잡기 전에 들었던 말, "돈까스 먹으러 가자"와 고아원 가기 전에 "짜장면 먹자”라는 말은 따뜻하게 들리지만, 그 따뜻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특히 짜장면은 한 끼 식사가 아니라 관계가 끝나는 순간에 붙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짜장면은 가장 평범한 음식라서 더 정확하다. 특별한 날의 음식이 아니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이건 배려라기보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능한 마지막 친절에 가깝다. 문제는 이 친절이 언제 등장하느냐다. 관계가 이어질 때가 아니라, 관계가 끊어질 때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미 성격이 바뀐다.


이건 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끝내기 위한 행위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상하게 남는다. 먹이고 나서 헤어진다. 챙기고 나서 끊는다. 따뜻함은 있지만 지속성은 없다. 이건 관계가 아니라 절차에 가깝다. 그래서 어머니가 짜장면을 싫어하셨나?


그리고 이런 구조는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 주식시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외국인이나 큰손이 물량을 정리하려 할 때, 시장은 자주 아주 짧은 안심을 준다. 갑자기 반등이 나오고, 의미심장한 뉴스가 돌고, “이제 바닥인가” 싶은 기대가 형성된다. 개미는 그 순간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만 더 들고 있으면 되겠구나. 어쩌면 다시 올라가겠구나. 그런데 바로 그 짧은 안심이 끝나면, 진짜 하락이 시작된다. 남는 건 안심이 아니라 정리된 물량과 뒤늦게 갇힌 사람들뿐이다.


그러니까 고아원 가기 전 짜장면과 털어내기 전 반등은 구조가 같다. 둘 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신호가 아니라,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신호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잘해줬다”는 감정을 남기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한 번 반등을 줬다”는 착각을 남긴다. 하지만 둘 다 결과는 같다. 끝내기 직전에 잠깐 부드럽게 만드는 절차일 뿐이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925)는 『The Gift』(증여론)에서 “The gift creates an obligation.”이라고 말했다. 선물은 관계를 만들고 의무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짜장면도, 저기서의 반등도 그런 의미의 선물이 아니다. 이건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지급이다. 그래서 선물이라기보다 정산에 가깝다. 짜장면 한 그릇은 책임을 끝내기 위한 비용이고, 반등 한 번은 물량을 넘기기 위한 비용이다.


이 지점에서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사람은 끊어낼 때 오히려 더 부드럽다. 완전히 버리기 전에 잠깐 먹이고, 완전히 털어내기 전에 잠깐 올려준다. 그래서 당하는 쪽은 더 쉽게 속는다. 마지막 친절을 관계의 증거로 오해하고, 마지막 반등을 회복의 신호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건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정리의 예고다. 책임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스스로의 죄책감을 줄이거나, 더 높은 가격에 떠넘기기 위한 기술뿐이다.


에바 일루즈(Eva Illouz, 2007)는 『Consuming the Romantic Utopia: Love and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사랑과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이렇게 말한다.


“Emotions have become objects of consumption and are increasingly shaped by market relations.”


감정은 소비의 대상이 되었으며, 점점 더 시장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감정이 시장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설명했듯이, 여기서도 감정과 가격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것은 죄책감을 가장 저렴하게 처리하는 방식이고, 시장에서 반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포를 가장 효율적으로 희석하는 방식이다. 둘 다 따뜻함이나 희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리의 기술이다. 책임을 끝내기 직전에 친절이 등장하고, 물량을 끝내기 직전에 희망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순히 슬픈 이야기나 투자 격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둘 다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가장 쉽게 속는 방식을 보여준다. 사람은 마지막 친절에 약하고, 마지막 희망에 약하다. 끝난 관계도 마지막 한 끼 앞에서 흔들리고, 끝난 차트도 마지막 반등 앞에서 흔들린다. 그러니까 무서운 것은 처음의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끝내기 직전에 주어지는 그 짧은 부드러움이다. 그 부드러움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매끄럽게 버리기 위해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짜장면의 본질은 음식이 아니다. 반등의 본질도 회복이 아니다. 둘 다 끝을 부드럽게 포장하는 기술이다. 관계가 끝나는 순간에 짜장면이 붙고, 물량이 끝나는 순간에 반등이 붙는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친절을 친절로만 보면 안 되고, 마지막 반등을 호재로만 보면 안 된다. 무엇이 이어지기 위해 주어졌는지, 무엇이 끝내기 위해 주어졌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가장 잔인한 친절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친절이다. 가장 위험한 반등은 아무것도 회복하지 않는 반등이다.

그리고 둘 다 언제나, 끝내기 직전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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