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 불안하지?
바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널널한 하루였다. 내 몫의 계획은 이미 90%쯤 작성해 두었고, 비구름 같던 국장님도 안 계셨다. 이 정도면 편해야 맞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불안해졌을까.
이 알쏭달쏭한 두근거림은 대개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럴 때는 꼭 뭔가가 터진다. 분명 터질 각인데, 문제는 뭐가 어디서 터질지 감을 못 잡겠다는 점이다. 마치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미 일이 자라고 있고, 나는 그 냄새만 먼저 맡은 사람처럼 불안했다.
그리고 역시, 내 촉은 맞았다.
나는 내일 또 저녁 식사 자리에 따라나가게 되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록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그냥 저녁 약속이다. 밖에서 보면 같이 밥 먹는 자리다. 하지만 내게 그 시간은 식사가 아니라 업무다. 긴장의 연속이고, 말 한마디도 흘려들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21시가 넘어서 끝나도 나는 고깃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연장근로를 인정받지 못한다. 지난 3월에도 그랬다.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그건 노동이 아니었다.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즐겁지 않은 시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 끝나고 나면 남는 피로.
이러니 내가 dam일 수밖에 없다. 막아야 할 건 내가 막고, 기록해야 할 건 내가 기록하고,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설명할 사람도 결국 나다.
그래서 오늘은, 어차피 인정받지 못할 내일의 야근을 오늘 당겨받는 셈 치고 그냥 야근을 하기로 했다. 차라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에 해버리는 편이 낫다. 인정은 못 받아도, 적어도 억울함의 방향은 내가 고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대개 빠지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에게 간다. 그리고 나는 늘 그쪽이었다.
최근에 유시민이 말한 ABC론이 떠올랐다.
가치를 먼저 보는 A,
이익을 먼저 보는 B,
그리고 그 사이를 조율하는 C.
굳이 정치까지 갈 필요 없다. 이건 그냥 회사다.
빠지는 사람은 대체로 B다. 손해를 먼저 계산하고, 리스크를 먼저 본다. 그러니 빠진다. 빠질 수 있을 때 빠지고, 안 걸릴 만큼만 남는다. 그래서 가볍다.
남는 사람은 대체로 A다. 기준이 먼저 떠오르고, 책임이 먼저 걸린다. 그러니 남는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 여기서 내가 빠지면 더 꼬인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무겁다.
이걸 우리는 보통 기회주의와 원칙주의라고 부른다. 문제는 기회주의가 훨씬 영리해 보인다는 점이다. 덜 다치고, 덜 피곤하고, 덜 얽힌다. 그래서 오래 간다. 반대로 원칙주의는 늘 조금 손해를 본다. 일은 더 가져오고, 욕은 더 먹고, 평가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많이 한다고 더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더 남는다고 덜 불려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계속 남는 놈이 될 뿐이다.
‘그놈’의 패턴은 늘 비슷하다. 자기가 가장 티 안 나는 일을 하고, 가장 티 나는 일을 누군가에게 던진다. 그러면 누군가는 헐떡거리며 일을 진행한다. 그때 개입을 시도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군가가 해 놓은 일은 자기 공으로 가져가고, 티 안 나서 품고 있던 일은 슬쩍 바꿔치기한다.
그런데 나에게 일을 던지면 얘기가 달라졌다. 나는 ‘그놈’과 내 일을 공유하지 않는다. 대신 국장님이나 팀장님과 다이렉트로 공유한다. 그러면 ‘그놈’은 내 일에 개입할 수 없다. 개입하지 못하는 순간, 자기가 놀고 있었다는 사실만 더 선명해진다. 이제 그놈도 나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에게 자기 일을 던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받아서, 자기보다 더 잘 끝내는 걸 최근에 직접 봤으니까. 그리고 그놈은 내가 알아서 남는 놈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이제는 수작질조차 쉽지 않다.
이쯤 되면 조금 웃긴다. 나는 내가 일을 못 피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계속 못 피한 게 아니라, 계속 남아 있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성실함의 문제도 아니다. 그 순간 무엇을 먼저 보느냐의 문제다.
손해를 먼저 보느냐, 기준을 먼저 보느냐.
세상은 생각보다 거창한 이념으로 나뉘지 않는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빠지는 놈이냐, 남는 놈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조는 늘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빠지는 사람은 가벼워서 오래 가고, 남는 사람은 무거워서 계속 붙들린다. 결국 조직은 빠지는 놈이 아니라 남는 놈으로 굴러간다. 그런데 보상은 늘 빠지는 놈이 더 잘 챙긴다.
어쩌면 그래서 기회주의가 신봉되는 세상으로 바뀐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단단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광복 이후에도 오래 이어져 온 것은 가치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라기보다, 기회주의와 원칙주의의 긴장이었다. 문제는 기회주의가 스스로를 언제나 더 안정적이고 더 정상적인 얼굴로 포장해왔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그것이 ‘질서’의 이름을 빌렸고, 어떤 때는 ‘현실’의 이름을 빌렸다. 반대로 원칙을 붙드는 사람들에게는 늘 과도한 기준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이상한 장면이 반복된다.
어떤 쪽은 퇴직금 50억을 받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어떤 쪽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도덕 시험대 위에 오른다.
이쯤 되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라기보다, 누가 더 능숙하게 기회주의를 정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는가의 문제에 가깝다.
최근에는 더 묘한 돌연변이들도 나타난다. 겉으로는 원칙과 가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철저히 계산된 이익의 언어로 움직이는 사람들. 스스로를 A라고 믿지만, 행동은 B에 가까운 사람들. 또는 원칙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기회주의가 훨씬 더 정교해진 형태들.
그러니 이제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엇을 먼저 보는가다.
손해인가, 기준인가.
빠질 것인가, 남을 것인가.
오늘도 누군가는 빠졌고, 나는 남았다. 그리고 이 구조는 내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빠지는 놈이 아니라 남는 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을 자기 것처럼 누리는 건 늘 빠지는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