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2

글을 오래 쓰려면 소재를 많이 가져야 한다.

by NaeilRnC

창작을 위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발품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 체험, 생각은 늘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만 굴린 문장은 시작부터 바닥이 보인다.

반면 몸으로 겪은 일은 오래 간다. 직접 본 것, 직접 들은 것, 직접 부딪힌 것은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 쓸 수 있다. 정보는 금방 닳지만, 장면은 오래 버틴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약 9개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다양한 검색을 했다. 그것도 나름의 공부였고, 나름의 축적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도 내 문장을 끝까지 붙잡아준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실제로 겪었던 장면들이었다. 정보는 머리에 남지만, 경험은 문장 안으로 들어온다.


예전에 지역컨설팅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소재가 생겼다. 늘 새로운 곳을 다녔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은 풍경이 남았고, 어떤 지역은 냄새가 남았고, 어떤 지역은 사람의 표정이 남았다. 현장에서 들었던 말 한마디,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던 분위기, 어딘가 조금씩 삐걱거리던 현실이 전부 글감이 됐다. 그때는 굳이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소재가 먼저 쌓였다.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문장에 붙일 재료가 넘쳤다.


그런데 출장이 전무한, 그저 그런 사무직의 일상에서 나올 수 있는 소재는 한계가 크다.

매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화면을 보고,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말을 주고받는다. 물론 사무실 안에도 이야기는 있다. 인간관계도 있고, 권력도 있고, 피로도 있고, 감정도 있다. 문제는 그 재료들이 너무 좁고, 너무 반복적이라는 점이다. 오늘의 짜증이 내일의 짜증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이번 주의 피로가 다음 주의 피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되면 글도 자꾸 제자리걸음을 한다.


정확히는, 문장이 가난해진다. 쓸 말이 없는 게 아니다. 비슷한 말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공간, 비슷한 갈등, 비슷한 피로 속에 오래 갇혀 있으면 문장도 결국 닮아간다. 처음에는 관찰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되풀이가 된다. 그때부터 글은 살아 있는 기록이 아니라, 피로의 복사본이 된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진다.
정확히는, 쓰는 기술보다 버틸 재료가 부족해진다. 문장은 억지로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소재는 억지로 만들 수 없다. 결국 글을 오래 쓰는 사람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기보다, 자기 안에 꺼내 쓸 장면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을 오래 쓰려면 결국 많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부딪혀야 한다. 꼭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된다.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몸을 두는 것만으로도 재료는 쌓인다. 글은 앉아서 쓰지만, 소재는 대체로 바깥에서 생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하다. 소재는 많이 산다고 자동으로 쌓이지 않는다.

살아도 그냥 살면 흘러가 버린다. 많이 보고도 아무것도 못 남기는 사람이 있고, 비슷한 하루를 살아도 표정 하나, 냄새 하나, 말 한마디를 끝까지 붙잡는 사람이 있다. 같은 경험도 누구에게는 소비되고, 누구에게는 축적된다. 그러니 글을 오래 쓰려면 많이 살아야 하는 동시에, 많이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기억의 기술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하루를 그냥 보내지 않고, 내 안에 한 번 더 걸어두는 일.
별것 아닌 대화를 흘리지 않고 붙드는 일.
지나간 장면을 내 식대로 다시 해석해두는 일.


아마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두 번 사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그냥 겪고, 한 번은 다시 떠올리며 산다.

겪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문장으로 옮기려고 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날의 공기, 상대의 표정, 내가 왜 그 순간 이상하게 서늘했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왜 그 장면만 오래 남았는지. 글은 지나간 삶에서 뒤늦게 의미를 캐내는 일이다.


그래서 소재가 많다는 건 단순히 많이 돌아다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를 살고 하루를 끝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다시 꺼내 문장으로 바꾼다. 글을 오래 쓴다는 건 결국 후자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자꾸 바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고, 새로운 사람의 말투가 필요하고,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필요하다. 계속 같은 자리에서 같은 피로만 되풀이하다 보면, 글도 결국 그 자리에서 맴돈다. 문장이 나를 살리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문장을 쥐어짜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지금 부족한 건 문장이 아니라 소재구나.

생각만으로 쓰는 글은 오래 못 간다. 오래 쓰는 사람은 대체로 많이 겪은 사람이다.

좋은 문장은 좋은 표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오래 남는 문장은 오래 남는 장면에서 나온다. 결국 글을 오래 쓰려면 문장보다 먼저 내 안에 꺼내 쓸 시간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체로 책상 밖에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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