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사유화

공적인 기준이 사라질 때

by NaeilRnC

언젠가 전철에서 웃기는 장면을 봤다.

임산부배려석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만삭의 산모가 서 있었다.

난 당연히 자리를 비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할머니는 산모를 보지 않았다. 대신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또 다른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심지어 노약자석은 비어 있었다. ‘응? 뭐지?’


이 장면이 웃긴 이유는 단순하다. 자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공적 기준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임산부배려석은 이름 그대로 특정한 대상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를 점유한 사람은 그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기 기준으로 다시 판단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체로 단순하다.


내가 보기에 더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주겠다.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만 움직이겠다.

그래서 임산부는 밀리고, 더 늙어 보이는 사람이 우선이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철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코인빨래방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커플이 큰 소리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그걸 듣는 내내 언짢았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그 자리가 자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일 것이다.

자기 빨래를 기다리고 있고, 잠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공간의 기준까지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태도는 에러다.


코인빨래방은 집이 아니다. 임산부배려석은 일반 좌석이 아니다.

각각의 공간에는 원래 그 공간을 작동시키는 공적인 기준이 있다.

조용히 해야 하고, 먼저 비워야 하고, 특정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준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공간의 성격보다 자신의 사용권을 먼저 생각한다.

내가 쓰고 있으니 괜찮고, 내가 먼저 앉았으니 내 자리이고, 내가 불편하지 않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공적 공간은 공적 공간이 아니라, 잠시 점유한 사적 공간으로 바뀐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97)은 『자살론』에서 규범이 약해진 상태를 아노미(anomie)라고 했다.

기존의 규칙이 더 이상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공통된 기준이 아니라 각자 기준으로 움직인다.


지금의 배려석도, 코인빨래방도 정확히 그렇다.

예전에는 “임산부에게 비켜주는 것이 맞다”, “공용공간에서는 조용히 하는 것이 맞다”는 규범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이 맞는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 배려는 끝난다. 문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간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권리의 언어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토머스 험프리 마샬(T.H. Marshall, 1950)은 『Citizenship and Social Class』에서 시민권을 권리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개인은 더 많은 것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게 된다. 이 흐름 자체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 권리의 감각이 공적 공간의 사용 방식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될 때다.


자리에 먼저 앉았으면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고, 공간을 사용하고 있으면 내 방식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이때 자리는 양보의 대상이 아니라 점유의 권리가 되고, 공간은 공존의 장소가 아니라 사용권의 장소가 된다.


그래서 임산부배려석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노인은 자신 역시 약자라고 생각한다. 오래 서 있기 어렵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왜 나만 비켜줘야 하지?” 이 순간 임산부와 노인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코인빨래방에서도 “왜 내가 소리를 줄여야 하지?”라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내가 돈을 냈고, 내가 사용하고 있고, 내 시간이니까 괜찮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건 권리의 확대가 아니다.

공간의 공공성을 삭제한 채, 권리만 남기는 방식이다.

이 장면들이 더 불편한 이유는 상호작용까지 무너졌기 때문이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59)은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역할을 읽고 행동한다고 설명했다. 상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읽어내는 능력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역할 읽기가 약해졌다. 임산부가 서 있어도, 그건 우선 신호가 되지 않는다. 옆 사람이 불편해 보여도, 그건 소리를 줄여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상황을 공적으로 읽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읽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가 겹치면서 지금의 장면이 만들어진다. 규범은 약해졌고, 권리는 강화됐으며, 상호작용은 끊어졌다. 그래서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 자기 기준으로만 움직인다. 그리고 그 기준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는 배려가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불편한 진실은 그 반대다. 배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유화되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배려를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기준으로만 배려한다. 자기가 납득하면 움직이고, 자기가 불편하지 않으면 멈춘다. 그 순간 배려는 사회적 규칙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 된다.


그래서 임산부배려석은 보호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누가 더 약자인지를 각자 판정하는 자리로 바뀌고, 코인빨래방은 함께 쓰는 공용공간이 아니라 잠시 점유한 개인 거실처럼 변한다. 이건 예절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 공간을 공적으로 다루는 감각이 무너진 문제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간단하다. 우리는 배려를 없앤 것이 아니다. 배려를 공적인 기준에서 개인의 판단으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공적 공간은 남아 있지만, 공공성은 사라진다.


지금의 시대는 배려가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기준으로만 배려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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