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의 개꿈

또 하나의 탁상공론

by NaeilRnC

이재명 정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처음 들으면 통쾌하다.

서울에 몰린 자원과 기회를 지방으로 나누고, 수도권 일극 체제를 흔들고,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겠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다. 교육부도 2026년 4월 15일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을 발표하며, 거점국립대 9곳 가운데 우선 3곳을 선정해 브랜드 단과대학, 특성화 융합연구원, AI 교육·연구 거점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의 설명만 보면, 이 정책은 단순한 대학 지원이 아니라 지역균형성장을 위한 국가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정책은 출발부터 결정적인 착각을 안고 있다. 교육부는 서울대라는 결과를 보고 있고, 서울대를 만든 원인은 보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를 여러 개 만들겠다는 말은 있는데, 서울대가 왜 서울대가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빈약하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86)는 『The Forms of Capital』에서 학력의 효용이 단지 시험 성적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the economic and social yield of the educational qualification depends on the social capital”

학력의 경제적·사회적 수익은 그 학력을 떠받치는 사회자본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허점을 정확히 찌른다. 서울대의 힘은 강의실 숫자나 실험실 면적만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서울대라는 학위가 강한 이유는 그 학위 뒤에 붙어 있는 네트워크, 채용 관행, 연구 권력, 사회적 인정, 그리고 서울이라는 중심의 자원이 결합된 상징자본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지금 대학에 돈을 더 넣으면 대학의 위신도 따라 올라갈 것처럼 말하지만, 부르디외의 언어로 바꾸면 그건 상징자본의 문제를 예산항목의 문제로 오해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건 무지를 넘어 무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정책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서울대를 키운 것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고, 서울대처럼 보이는 대학 몇 개를 더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마치 스티브 잡스를 키우기 위해 차고를 늘리는 짓처럼 느낀다. 스티브 잡스를 만든 것은 차고의 개수가 아니었다. 기술, 시장, 투자, 네트워크, 시대의 흐름, 그리고 그것을 엮어낼 생태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차고만 잔뜩 지어 놓고 “이제 스티브 잡스가 나오겠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책이 아니라 망상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도 똑같다. 서울대라는 결과물의 외형만 흉내 낸다고 해서 서울대의 기능이 복제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경기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고가 명문 고등학교였던 이유는 강남으로 옮겨서가 아니다. 경기고등학교는 강북에 있을 때부터 이미 명문고등학교였다. 경기고는 1900년 화동에서 출발했고, 1976년 강남 개발 정책의 흐름 속에서 삼성동으로 이전했다. 다시 말해, 강남이 경기고를 명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명문이었던 경기고가 강남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건 단순한 학교 이전사가 아니다. 명문은 주소 이전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그런데 교육부는 지금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서울대급 대학을 지방에 “배치”하면 서울대급 경쟁력이 생길 것처럼 말한다. 경기고의 역사를 제대로 읽는다면 그런 식의 발상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명문은 옮긴다고 생기지 않는다. 명문은 축적되고, 인정되고, 기능을 통해 형성된다.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 1957)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겹친다. 뮈르달은 『Economic Theory and Underdeveloped Regions』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지역 간 발전은 자연스럽게 균형으로 수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말을 적용하면 2025~2026년 수도권 인구 집중도가 50%를 상회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지방에 '서울대급' 대학을 세우는 '확산 효과(Spread effect)'보다, 서울의 일자리와 인프라가 학생을 다시 끌어올리는 역류 효과가 훨씬 강력하다는 것이다. 즉, 사람과 자본과 기회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에서는 주변에 약간의 지원을 얹는다고 해서 판이 뒤집히지 않는다.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 체제가 바로 그렇다. 좋은 학생이 서울로 가고, 좋은 기업이 서울로 몰리고, 좋은 일자리가 다시 서울의 대학을 강화한다. 이런 구조를 깨려면 중심이 쥐고 있는 기능을 떼어내야 한다. 그런데 교육부는 지금 서울이 독점한 원인을 건드리기보다, 지방에 서울대의 결과만 복제하려 든다. 그러니 이 정책은 처음부터 구조 개혁이 아니라 구조 위의 페인트칠처럼 보인다.


현실은 이미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구미와 경북권의 대학 경쟁력은 오랫동안 지역 산업과 떼어 놓고 말할 수 없었다. 지역 산업 기반이 흔들리면 지역 대학의 기대 수익도 같이 흔들린다. 좋은 학과가 있어도 졸업 뒤 갈 곳이 줄어들면 수험생은 냉정해진다. 대학의 위상은 대학 이름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산업과 일자리 전망이 함께 만든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정말 지역 거점대학을 살리고 싶다면, 대학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수익을 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정책은 산업과 정주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국토 전략이 아니라, 교육부가 다룰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대학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다가 해야 할 것을 놓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무능이다.


반대로 양평의 양서고는 다른 방향의 교훈을 준다. 양서고는 ‘좋은 지역’이어서 주목받은 학교가 아니다. 한때는 ‘꼴통들만 가는 학교’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숙사 운영과 높은 대입 성과를 기반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실제로 끌어들였다. 중요한 것은 간판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학생과 학부모는 슬로건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학교에 가면 실제로 결과가 나온다는 확신이 있을 때 움직인다. 사람은 이름을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 기능을 따라 이동한다. 지방대도 같다. “서울대급”이라는 표어를 붙인다고 인재가 몰리는 것이 아니라, 그 대학에 가면 연구가 되고, 취업이 되고, 삶이 이어진다는 계산이 서야 움직인다. 교육부가 아직도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른다면, 그건 정책 실패가 아니라 현실 부정이다.


폴 디마지오(Paul J. DiMaggio)와 월터 파월(Walter W. Powell, 1983)은 『The Iron Cage Revisited』에서 조직이 왜 서로 닮아가는지를 분석했다.

“rational actors make their organizations increasingly similar as they try to change them”

합리적 행위자들은 조직을 바꾸려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비슷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지금 교육부가 하는 일을 거의 예언처럼 설명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발상은 결국 지방대학을 서울대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브랜드 단과대학, 연구원, AI 거점, 특성화 트랙, 파격 지원. 겉으로 보면 뭔가 새롭고 공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마지오와 파월의 말대로,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동형화일 수 있다. 닮는다고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를 흉내 내는 조직을 늘린다고 해서 서울대의 기능이 복제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부는 지금 대학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외형을 설계하고 있다. 그 차이를 모르는 무능이 바로 이 정책의 핵심 리스크다.


더 불편한 질문도 있다. 서울대를 10개 만들면, 서울대의 경쟁력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단지 서울대의 기득권을 지키자는 말이 아니다. 정책이 정말 서열을 해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서울대라는 상징을 그대로 둔 채 그 아래에 ‘서울대급’ 대학들을 새로 배치하겠다는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서울대의 위상은 일정 부분 희소성과 독점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교육부는 한쪽에서는 서울대급 대학을 늘리겠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대라는 상징자본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전혀 해체하지 않고 있다. 이건 서열 해소가 아니다. 서열의 이름만 바꾼 재배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 정점 체제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상징의 권위는 그대로 활용하는 정책이다. 그러니 이 구상은 처음부터 모순을 안고 출발한다.


결국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진짜 전제는 서울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분산하는 데 있어야 한다. 국가 연구개발 자원을 지방 거점대로 옮기고,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채용을 지역 대학과 실질적으로 연동하고, 대학원 연구 인프라와 교수 확보 구조를 지방에 심고, 청년이 그 지역에서 일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서울대의 힘을 만든 원인을 건드리지 않은 채 서울대의 결과만 지방에 찍어내겠다는 발상은, 교육부가 구조를 설계할 능력이 없다는 자기고백처럼 들린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교육개혁의 언어를 빌렸지만, 실은 교육부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름은 거창하게 짓고, 내용은 사업화하고, 성과는 숫자로 포장하는 방식 말이다. 그래서 이 정책은 위험하다.


지방을 살리겠다는 말은 맞지만, 지방이 살아나는 조건을 건드리지 않는다.

대학 서열을 완화하겠다는 말은 맞지만, 정작 서울대라는 서열의 작동원리는 보존한다.

교육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말은 맞지만, 실제 교육부는 익숙한 사업 메뉴판만 조금 더 비싸게 다시 내놓는다.


이런 정책은 현장에 희망보다 피로를 준다.

지방대에는 또 한 번의 경쟁을 강요하고, 비선정 대학은 또 한 번의 낙인을 남기고,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또 한 번의 환상을 판다. 그 환상의 핵심 문구가 바로 ‘서울대 10개’다. 그러나 서울대를 닮은 간판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울의 기회가 지방으로 옮겨오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서울대를 10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서울대가 독점해 온 기능을 나누는 일이다.

그것이 빠진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결국 서울대를 비판하는 정책이 아니라, 서울대라는 브랜드를 빌려 지방대 지원사업을 포장한 정책에 가깝다. 그러니 이건 개혁이 아니다. 개혁을 흉내 낸 사업이다.


그리고 그 사업을 설계한 교육부는, 지금도 대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설명 가능한 항목들로 쪼개 예산서에 넣는 데 익숙한 관료조직일 뿐이다. 서울대가 왜 서울대인지도 모른 채 서울대 10개를 만들겠다는 발상. 그것은 비전이 아니다. 오만이다. 전략이 아니다. 개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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