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6-1

아이러니

by NaeilRnC

오전에 국장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먼저, 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번아웃이 한 번 왔고 그 이후로 내가 많이 예민해졌다는 말을 전했다.

아주 쉽게,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우울증이라는 건 구겨진 은박지 같은 거라고. 한 번 구겨지면 다시 펴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한 번 생긴 자국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처음 이곳에서 힘들었던 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더 힘들다고 했다.


월급 계산을 잘못했던 Y, 그리고 그 이후 사과 한마디 없이 인신공격을 이어가던 그녀 때문에 이미 팀장님과 두 번이나 면담을 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개선시켜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그만둘까 계속 고민해왔는데, 어제 우연히 오퍼가 하나 들어왔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이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컨설팅을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사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도 처음에는 꽤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Y의 조리돌림이었고, 거기서 나는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이곳의 일을 빨리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추진계획은 다 작성했고, 이제 결재만 받으면 되는 상황이니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했다. 이번 주까지만 출근하고, 반차 하나와 연차 하나가 남아 있으니 오늘 오후 반차를 쓰고 내일 연차를 쓰면 깔끔할 것 같다고도 전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결심을 속으로만 품고 있을 때보다, 입 밖으로 꺼낸 뒤가 더 정리되는 법이다.


그리고 오늘 본청으로 결재를 받으러 갔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결재 때만 인사를 나누던 경제기획팀장님이 나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용은 공모사업이었다. 본청에서는 이번에 공모사업에 지원하려고 준비 중이었고, 그 작업을 우리 조직이 맡아주길 요청했는데 ‘그놈’이 중간에서 컷트를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따로 도와달라는 말이 돌아온 것이다. 과장님은 이 업무를 원래 내게 부탁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처음 그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공모사업 계획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보고 나니 아주 쉬운 일처럼 보였다. 나는 세 가지 유형 중 가장 예산이 큰 유형 하나를 짚으면서 말했다.


“유휴공간에 스타벅스를 유치하면 됩니다.”


모종린 교수 특강을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고, 그때 특강에서 강조했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라고 하자 담당 주무관이 카페와 베이커리를 언급했다.


“맞아요. 청년몰은 예산만 버리는 사업입니다. 차라리 유휴공간을 기업에 장기임대하고, 임대료를 받아서 그걸로 상인회 자산화를 하는 게 더 싸게 먹힙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본청 팀장, 주무관, 과장님의 반응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 떠나겠다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인데, 여전히 밖에서는 내게 일을 묻고 있었다. 정작 내가 견디지 못한 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고, 결국 사람과 구조의 문제였다는 사실이 또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본청의 팀장님과 주무관님, 과장님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늘 사무실은 국장님과 팀장님이 출장 중이라 완전히 Y의 세상이었다. 그래. 마음껏 즐겨라. 너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도 오늘까지만이다.


사인까지 완료한 사직서는 팀장의 책상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난 이제 반차를 쓰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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