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5-2

무기여, 안녕

by NaeilRnC

면접을 마무리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프리랜서를 제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5월부터 출근하는 방향으로 잠정 합의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사직이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다. 그동안 나에게 몰려 있던 일들이, 내가 빠지는 순간 전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 내가 대신 막아주던 것들, 내가 적당히 넘겨주고 적당히 덮어두고 적당히 설명해 주던 것들이 이제는 다들 자기 몫을 찾아갈 것이다. 정말 볼 만하겠다.


그동안 너희는 나를 god-dam처럼 써왔다. 위에서 쏟아지는 걸 막고, 중간에서 꼬이는 걸 정리하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설명도 내가 했다. 그러니까 너희는 편했을 것이다. 누군가 하나가 중간에서 다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dam이 빠지면 물길은 원래 흘러가야 할 데로 간다.


그게 어디로 갈지, 이제 너희가 직접 보게 되겠지. 그동안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내가 메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대신 욕먹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일이 돌아가는 줄 알았겠지. 아니, 정확히는 돌아가게 보였겠지. 그런데 사람이 하나 빠지는 순간 그동안 누가 뭘 막고 있었는지는 금방 드러난다. 나는 그 장면이 조금 기대된다.


누군가는 일정을 보고 당황할 것이고,
누군가는 파일을 열어보고 욕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걸 왜 나한테?”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제 와서 “원래 이건 누가 했지?”라고 묻게 될 것이다.


그 질문의 끝에는 항상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없다.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아니, 정확히는 통쾌하다. 그동안 너무 자연스럽게 내 몫이 아닌 것까지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자연스러움이 깨지는 장면을 좀 보고 싶다.


한번 헐떡여 봐라.
한번 정신없이 뛰어다녀 봐라.
한번 “왜 이렇게 일이 많지?”라는 말을 직접 해봐라.


그동안 내가 들었던 말과 내가 삼켰던 한숨과 내가 대신 맞아가며 넘겼던 시간들이 이제는 조금씩 너희 차례가 될 것이다. 엿 돼봐라. 이것들아. 솔직히 말하면, 퇴사를 빨리 처리하고 집에서 며칠이라도 푹 쉬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쉬는 것도 허락받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적어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소모됐다는 느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근무하게 될 곳은 집에서 편도 1시간 30분이 걸린다. 가산디지털단지. 옷 사러도 잘 안 가던 곳인데, 이제는 매일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 한때 양수리에서 홍대까지 출퇴근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살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제자리에 서서 계속 닳아 없어지는 느낌은 아닐 것 같다. 멀어지는 건 거리뿐이고, 가까워지는 건 오히려 숨통일지도 모른다.


아쉬운 건 있다. 지금 회사 근처에 3개월치 끊어두었던 헬스장은 그냥 사회적 기부로 남을 것 같다. 그동안 세 번인가 갔나. 매일 야근하느라 잘 가지도 못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달만 끊을 걸 싶다. 내 건강도 못 챙기고, 돈도 날리고, 참 마지막까지 이 회사답다.


새로 가게 될 곳에는 아는 사람이 둘 있다. 나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술찾사 멤버 한 명, 그리고 여자친구.

그리고 이 둘은 나와 싸울 일이 거의 없다. 셋이 같은 팀으로 일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이유 없이 소모되거나, 괜히 사람한테 닳는 일은 덜할 것 같다.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위안이 된다. 생각해 보면 퇴사라는 건 꼭 멋진 결심 끝에 오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알게 된다. 더 버티는 것이 성실이 아니라 소모라는 걸. 여기서 더 견디는 건 책임감이 아니라 자기 방치라는 걸. 오늘은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내가 없어도 된다는 걸 너희가 직접 배우게 되겠구나.


아직 사직서를 낸 것도 아니고,
아직 마지막 출근을 한 것도 아니고,
아직 정리가 끝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조금 먼저 나가 있었다. 무기여, 안녕.

이제 나는 계속 남아서 막아주는 쪽이 아니라, 빠지고 나서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쪽을 택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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