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함이 왜?
비가 와서였을까. 돌아오는 길이 왠지 모르게 먹먹했다.
나는 분명 갈 데가 있다. 게다가 지금보다 조건도 더 좋다. 그런데 왜 이럴까.
아마 본청에서 들었던 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면접을 볼 때, 나는 공모사업을 통해 예산을 많이 확보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청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같은 사무실 사람들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내 능력을 더 알아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사람은 미워서 떠나는 것 같아도, 막상 떠나려고 하면 꼭 미움만 남는 건 아닌가 보다. 억울함도 남고, 안도감도 남고, 어딘가에서는 알아봐 줬다는 묘한 위로도 같이 남는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다. 한 시간쯤 잤을까. 일어나 앉아 TV를 켰는데, 문득 한창 우울증이 심했을 때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밀려오는 불안감. 나, 잘한 거 맞지?
사실 지금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단순하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일과의 싸움이다.
제안서를 쓰고, 계획을 짜고, 협의하고, 관철하거나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현장도 다녀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 부산을 갔다 올지도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 완도를 갔다 올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 녹초가 된 상태로 뻗어 자고, 아침이 되면 또 출근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두려운 건 떠나는 것 자체가 아니다. 다시 너무 열심히 살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예전의 나는 열심히 버티다가 한 번 무너진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더 좋은 조건 앞에서도 무조건 기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더 나은 곳으로 가면 당연히 후련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 번 무너져본 사람은 새로운 시작 앞에서도 먼저 자기 상태를 살피게 된다. 내가 이 선택을 잘한 걸까. 정말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방식의 소모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걸까. 비 오는 날이라서 먹먹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끝났다는 안도감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먹먹함은 미련이 아니라 예감에 더 가까웠다. 좋은 조건이라는 말 하나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앞으로 내가 다시 감당해야 할 시간들의 무게에 대한 예감.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봤다.
나, 잘한 거 맞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다. 여기에 더 남아 있었다면 나는 더 빨리 닳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선택이 정답인지는 아직 몰라도, 적어도 오답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