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7

유종의 眉

by NaeilRnC

내가 이곳에 취업했을 때 주변에서는 모두 정년보장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진급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박사를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학교에 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1학기를 앞두고 결국 휴학을 했다.


일은 많았다. 기득권이 하기 싫은 모든 일이 ‘업무분장’의 탈을 쓰고 나에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그동안 몸담았던 곳에 비하면, 이곳의 일은 오히려 잡무에 가까웠다. 빡세지도 않았다.

적어도 일만 놓고 보면 버틸 수 있었다. 그랬는데 결국 사람 문제였다.


컨설팅 쪽은 일이 많고 워낙 빡세다 보니 직원들끼리 오히려 연대가 좋았다.

다른 곳으로 이직한 동료와도 제안발표장에서 “OO프로!”를 외치며 인사할 정도였다.

일은 힘들어도 사람이 버팀목이 되어주는 세계였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그리고 잡도리.

일을 못해서 까이는 건 참을 만하다. 내가 실수한 거니까. 내가 못한 거니까. 그런데 잡도리는 감당이 안 됐다.

처음에는 받아들이려고 했다.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건 훈육이 아니라 사람을 갉아먹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받아들임은 짜증으로 바뀌었고, 짜증은 결국 경멸로 갔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저따위한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됐다.

그쯤 되니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간다.

정년보장이 되지는 않지만, 일은 훨씬 힘들고 죽겠지만, 최소한 그곳에는 잡도리가 적다. 빌런도 적다.

몸은 더 힘들 수 있어도, 사람 때문에 정신이 닳는 일은 덜할 것 같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인수인계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내가 작성했던 추진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

워낙 타이밍을 잘 잡았던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대충 일하는 척 밍기적거리다가 국장님과 점심을 먹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동안 폐만 끼치고 나가서 죄송합니다. 건강하시길"(사실은, 빅엿 드세요였다.)


퇴사가 완료되었다. 원래는 일요일에 있을 예정인 축제까지 도와주려고 했다. 어쨌든 내가 하던 일이었고,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빠른 손절. 뭐,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끝까지 남아서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굳이 붙잡지 않는 조직.

정이 없어서라기보다, 애초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기능으로만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요할 때는 붙들고, 끝났다고 판단되면 바로 놓는 방식. 생각해 보면 이곳은 처음부터 늘 그랬다.

그래서 오히려 깔끔했다. 유종의 眉라는 말은 보통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사람에게 붙는다.


그런데 가끔은 다 끝난 뒤에야,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일 때도 있다.
나는 오늘 내 일을 정리했고, 내 자리도 정리했고, 마지막 인사도 했다. 할 만큼은 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유종의 미는 꼭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니라, 더 망가지기 전에 제 발로 걸어 나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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