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지애수

폐기의 온정

by NaeilRnC

배경 : 2019년 8월 집을 나와 혼자 자리잡은 곳은 누구나 꿈꾸는 ‘슬세권’이었다. 편의점과 대형마트, 온갖 술집과 버스정류장, 8호선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은 심지어 월세도 지방 수준이었다. 오늘은 나의 익숙한 일상 속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 그녀와의 은밀한 거래

집 앞 편의점에는 늘 같은 두 사람이 있었다. 낮에는 여자, 밤에는 남자. 그들은 마치 편의점의 구조물처럼 5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특히 낮 알바생은 언제나 조용히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처음엔 학생인 줄 알았지만, 5년째 같은 자리에서 단어장을 넘기는 학생은 없다. 그녀는 뭔가 신비로웠고, 왠지 모르게 궁금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외국 과자를 간식으로 풀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여름이었고, 안에 초콜릿이 들어 있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퇴근길에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가방 속 과자를 꺼내 그녀에게 몇 개 건넸다.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데 인사 한마디 없기도 뭐해서 건넨, 그저 소소한 예의였다. 그런데 그날의 과자가 예상치 못한 계기가 되었다.


며칠 후부터 그녀는 나에게 편의점 ‘폐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는 편의점 알바 출신이었다. 1999년 시급 1,900원 시절부터 일했으니, ‘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몰래 챙겨둔 도시락은 밥의 식감이 살아 있었고, 반찬 구성도 훌륭했다. 그렇게 우리는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묵시적 거래를 이어갔다. 나의 과자와 그녀의 폐기가 만들어 낸 묘한 공생관계였다.


□ 폐기의 철학

편의점에서 일할 때, 폐기는 단순한 ‘남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건 손실(LOSS)을 메우는 작은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 시절 내 주변엔 학원가의 중학생들이 많았고, 나는 미리 폐기된 삼각김밥을 200원 싸게 팔아 분실된 금액을 메웠다. 그 돈으로 잃어버린 물건 값을 채웠고, 남은 폐기 음식은 나의 하루 세 끼를 해결해주는 고마운 동반자였다. 나는 폐기 도시락을 냉동실에 모아뒀다가, 전자레인지에 한꺼번에 돌려 비빔밥처럼 먹었다. 이상하게 그 맛을 좋아하는 단골도 생겼다. 그래서 나에게 폐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관계의 은유’였다. 누군가의 손에서 버려진 것을 또 다른 누군가가 나눠 먹고, 그 과정에서 조용한 정이 피어나는 것. 지애수 씨와의 관계도 그랬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작지만 묘하게 따뜻한 연대였다.


□ 참치마요의 역습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은 이거밖에 없다면서 그녀가 내민 것은 참치마요가 들어있는 도시락이었다. 아주 오래 전 광주광역시에서 리서치 일을 할 때 편의점에서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잘못 먹고 급체한 적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추위에 떨면서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 이후 참치마요는 나에게 금기음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간은 오래되었고, 돈 없는 중년 독거남에게 폐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사치였기 떄문에 무심코 그 도시락을 받아왔다. 전자레인지에 따뜻하게 데운 도시락은 뚜껑을 열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허기졌던 나는 그 냄새를 김치향으로 이해했고, 톡 쏘는 맛도 김치 떄문이라 합리화했다.


그러나 밥을 다 먹은 후 지옥의 문이 열렸다. 내시경 전날 마신 관장약에서 무덤덤하던 나의 장이 폭주기관차처럼 흔들리기 시작했고 한밤중 화장실은 전쟁터로 변했다. 이러다 창자가 나오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더 무서운건 물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을 마시면 모든 게 리셋되어 장이 다시 꿀럭거렸기 떄문이다. 그렇게 하얗게 불태운 밤이 지나고, 다시는 참치마요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날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담배와 커피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았지만, 이제 그녀가 준 폐기를 정중히 거절하게 되었다. 그녀의 호의로 본의 아니게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폐기를 건넨 건 그녀였지만, 선택한 건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그녀와의 관계는 더이상 불편하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건 우리가 서로의 선을 지키며 묘한 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기 떄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름표에 적힌 ‘지애수’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를 지애수씨로 부르며 오늘도 편의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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