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면 두 아들과 나는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여행 트로이카'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왜 힘들게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느냐고 성화다. 남편은 방학이 없어서 일정을 맞추기 어려우니 객원 여행자로 참여하고 '나'라도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겠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다.
물론 이면에는 (모든 워킹맘들이 그렇듯)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보상심리 같은 것이 깔려있다. 어쨌든 둘째 아이가 네 살 무렵부터 우리 셋의 여행이 시작되었으니 10년이 넘은 베테랑들이다.
우리의 여행 룰은 간단하다. 각자 가고 싶었던 장소를 선정하고 그 이유를 브리핑한다. 모든 가족들이 찬성하면 여행 일정에 추가된다. 숙소와 반드시 해야 할 일 2가지 정도를 함께 선택하면 나머진 자칭 여행계획자인 엄마의 역할이다. 방학이 되면 짐을 미리 싸 놓는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삶은 여행이니까.
# 곡성, 따뜻함에 대하여...
'여행 트로이카'의 첫 여행지는 곡성 기차마을이었다. 기차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선택한 장소였다. 배낭을 메고 3살, 5살 아이들은 유모차에 태우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30대의 엄마는 패기가 있었다. 하지만 유모차를 기차에 싣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다행히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50대의 아주머니는 아이를 번쩍 안아서 기차에 태워주셨고, 승무원은 유모차를 번쩍 들어 실어 주셨다. 기차 안에서 마주 보고 앉은 승객은 아이들에게 과자와 과일도 나줘주셨다. 다정한 미소와 함께. 덕분에 아들은 엘리베이터에 타는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줄 아는 따뜻한 아이로 자라났다.
곡성 기차마을, 2013년
드디어 저녁 6시쯤 곡성역에 도착했다. 시골 여행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해가지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다는 것도, 편의점이나 음식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괜찮았지만 아이들 밥을 먹여야 하니 불빛이 살짝 새어 나오는 음식점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혹시 저녁식사 가능한가요?"
문이 열리고 잠이 가득한 눈을 비비시며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아주머니는 이미 닫힌 식당 문을 다시 열어 주셨고 아이들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햇반과 김을 비상식량으로 챙겨 다니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가 건넨 배려가 모여 그날 우리의 여행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작은 배려와 생각들이 세상을 달라지게 만들 거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쌓여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살기 좋아지는 법이니까.
# 여행, 변수가 가지는 힘
여행은 변수의 연속이다. 때론 그 변수가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행 트로이카'의 가장 긴 여행은 제주도였다. 일주일로 예정이었던 여행은 이런저런 변수에 조금씩 길어져 보름이 되었다.
처음 묵었던 숙소에는 사장님의 일을 도와주러 온 20대 초반의 조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형을 따라다니며 일손을 도왔다. 말이 일손이지 그에게는 분명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귀찮은 내색 없이 아이들과 잘 지내주었다. 마지막 날 형은 다락방에서 본인이 읽었던 동화책을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내어주었다. 아들은 태어나서 처음 제 손으로 번 동화책을 아주 오랫동안 아꼈다.
아들에겐 그 동화책이 형을 생각나게 하는 소중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숙소에는 아들과 동갑내기 사장님 아들이 있었다.
"우리 같이 놀래?"
그 말 한마디에 부끄러워 한마디 못하던 아들은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 숙소에 있는 내내 함께 자전거도 타고 바비큐도 먹고 밤낚시도 갔다. 그 덕분인지 아들은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건네고 친구가 되는 특별한 재능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숙소, 친구를 사귀는 방법
세 번째 숙소는 바닷가 바로 앞이었다. 눈만 뜨면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를 볼 수 있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여행의 마지막을 이틀 앞둔 아침, 바닷가에 나갔다가 여행 온 가족을 만났다. 시크한 중학생 형과 수다쟁이 4학년 누나였다. 아이들은 형과 누나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는 강력한 떼를 시전 했다. 누나와 형이라는 변수는 우리의 여행을 연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현재가 된다는 것, 여행은 계속된다.
여행에서 만난 누군가의 추억 속에 한 페이지로 남는다는 건 낭만적인 일이다. 또한 그 추억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아들이 여행길에 만났던 누군가의 배려가 아들이 만날 누군가에 대한 배려로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