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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Jun 21. 2020

일요일 저녁의 삼겹살

그날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우리 가족은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사전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도 어머니는 항상 두툼한 생삼겹살을 냉장고에 준비해두셨고, 나와 동생은 저녁 무렵이 되면 자연스럽게 고기를 구울 상을 피고, 신문지를 깔며 갖가지 준비를 했다. 직장인인 나와 동생에게 일요일 저녁이란 시간은 대체로 마음이 무거운 시간이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될 폭풍우 같은 업무를 해내기 전,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며 각오를 다지는 다짐의 시간이었고 충전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우리는 늘 삼겹살을 구웠다. 






1. 삼겹살 먹는 노하우 : 고기 선택부터 곁들일 재료까지


삼겹살을 자주 구워 먹다 보니, 점차 맛있게 먹는 노하우들이 늘기 시작했다. 우선은 양질의 삼겹살을 구하는 게 중요했는데 대형마트와 집 주변 정육점 등 몇 군데에서 다 사서 구워 먹어본 결과, 집 건너편 축산점에서 파는 삼겹살이 퀄리티로 보나 금액 대비 양으로 보나 제일 괜찮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우린 그 축산점의 VIP 고객이 됐고 고기를 살 때마다, 서비스로 파무침 등 갖가지 덤을 얻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양질의 고기를 가져와서 맛있게 먹기 위해선 적정한 온도의 불판에서 최대한 젓가락질을 적게 하며 노릇노릇하게 구워내는 게 중요했다. 굽는 부분에 있어서도 사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중불로 5분 이상 불판을 가열한 뒤 돼지비계 부분을 살짝 불판에 올려서 고기가 익는 정도를 확인했다. 어느 정도 '쏴아아'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날 때쯤이 고기를 불판에 올릴 최적의 시점이었다.


굽는 거 외에도 또 하나의 노하우는 삼겹살과 곁들일 재료들의 조합이었다. 처음엔 고기에 기본적인 쌈장, 마늘, 고추, 김치, 상추쌈 정도만 즐기다 어느 순간 실험적으로 재료들을 하나씩 추가해나갔다. 특히나, 입이 짧은 편이셨던 아버지는 고기 외에 시그니처가 될 수 있는 재료들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셨고 고구마, 가래떡, 깻잎장아찌 등 갖가지 재료들을 추가해서 삼겹살의 풍미를 더욱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곁들이는 재료들 중에서 구운 가래떡을 참 좋아했는데 적당한 굵기로 썬 가래떡을 삼겹살의 기름이 배게 한 뒤 센 불에 앞뒤로 익혀서 먹는 식감은 완벽한 '겉바속촉'이었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가래떡 본연의 촉촉함을 느낄 수 있어 절로 입맛이 살아나곤 했다.






2. 삼겹살엔 소주 한잔 :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게 소주였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아들 둘이 성인이 되면 같이 소주 한잔 하겠다는 걸 큰 즐거움으로 여기며 기다려 오셨던 분이다. 자식들이 어른이 된 지 한참 지났지만, 아버지는 삼겹살을 곁들어 아들들과 소주 한잔 즐기는 걸 참 좋아하셨고, 소주 한잔을 걸치며 자연스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랬다. 또래 친구들의 가정에 비해 우리 집은 좀 독특했다. 그리고 독특하다는 것도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우선,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인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장남으로서 그리고 집안의 장손으로서 집안 가족들을 이끄는 역할을 30대 초반 일찍부터 시작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만 해도 친척이면 다 친하고 자주 만나는 건 줄 알고 살았는데, 크고 나서 보니 아버지께서 가족들 간의 화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무수히 많은 노력을 해오고 계셨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소주 한잔을 걸칠 때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 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형은 동생을 보듬을 줄 알아야 하고, 동생은 형을 잘 따라야 한다고... 사실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 예전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적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이 삶의 순간순간에서 희로애락이 있을 때마다 주변의 친척들과 어려움 또는 기쁨을 나눠가며 고된 삶을 극복해나갔던 데에는 아버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또 감사하다.


아버지 스타일이 이러시다 보니, 일요일 저녁의 삼겹살 파티에는 이따금 씩 손님들이 오곤 했다. 같은 부산에 사는 큰 고모네, 큰 이모네 등 손님으로 오는 친척들은 누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오기로 한 날이면 삼겹살 구워 먹을 준비를 돕고,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사들고 오곤 했다. 친척들이 손님으로 오면 또 재밌는 일들이 많았는데, 과거 에피소드들을 꺼내 놓으며 힘든 시간을 헤쳐 나갔던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촌들의 근황을 묻고 답하며 수다를 떠는 재미가 쏠쏠했다.






3. 삼겹살엔 소주 한잔 : 아버지의 독백


이러한 소소한 이야기 뒤에는 아버지의 독백 타임이 이어졌다.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시간을 거쳐오면서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분이었다. 뭐 하나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고, 잠깐의 직장 생활 이후 여러 가지 자영업을 해오면서도 제일 신경을 썼던 부분은 '큰 성공은 안 하더라도, 가족들을 위해서 망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신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 신념과 관련된 경험담을 우리에게 많이 들려주셨다. 외상값 안 떼이는 노하우, 도매상에서 물건을 싸게 떼 오는 법, 사기당하지 않는 법 등등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살아온 경험에 기인한 이야기였고 유튜버로 전향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반전과 깨알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 적엔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리 크게 가슴에 와 닿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말씀이라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생각해보니 험난했던 삶의 여정에서 가족들을 책임지고 살아가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바로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은 최근에도 여전히 일요일 저녁이면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가 많다. 물론, 최근엔 과거처럼 아버지의 일장 연설을 듣는 시간보다는 어머니, 동생과 과거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화제가 되는 방송 <미스터 트롯>의 출연진에 대해서 서로 심층 분석을 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나 동생이 각자 생각하는 재밌는 삶을 살기 위한 의견들을 많이 제시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버지는 과거보다는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주시려고 노력하신다. 


일요일 저녁, 두툼한 생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일요일 저녁의 삼겹살  ⓒ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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