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살린 뻔하지 않은 로맨스 드라마
TV 프로그램을 TV로만 보는 시대가 아니다 보니, 요즘엔 역주행 신드롬이란 말이 생겼다
본방 당시는 기대보다 시청률이 낮았더라도 종영 후에 다양한 채널을 통해 회자되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2019년 9월에 종영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도 이러한 역주행 신드롬의 주인공이다. 영화 <극한 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서른 살 즈음 여자 셋의 일과 연애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넷플릭스 추천을 통해 우연찮게 1화를 보다가 인물들의 탄탄한 심리묘사와 명대사 대잔치에 끌려 16부작을 정주행 하게 됐다
3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이 탄탄하다
드라마 작가인 임진주 역(천우희),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은정 역(전여빈), 드라마 마케팅 회사 팀장인 황한주 역(한지은). 이들 셋은 오랜 친구다.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고민도 많고, 나름의 철학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스타 작가 밑에서 오랜 시간 보조작가를 하며 드라마 작가의 꿈을 키워온 진주는 스타 작가의 히스테리와 모진 고난 속에서도 작가의 꿈을 위해 매일같이 혹독한 정신노동을 견뎌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능력이 커지는 건지, 참을성만 높아지는 건지 구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참고 또 참는 시간들을 보낸다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영상으로 담아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꿈이 있던 은정은 꽤나 유망한 다큐멘터리 제작회사에 취직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꿈과 달리 회사 생활은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일과들의 연속이었고, 꿋꿋이 참아내는 게 최선인가에 대한 의문을 계속 가지게 한다. 한주는 뛰어난 외모로 대학 때부터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수많은 이성들이 그녀에게 대시하고, 고백했지만 그녀는 결국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자신에게 대뜸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고민하던 황당한 남자와 만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나, 그 남자는 돌연 떠나버리는 미혼모의 삶을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회사원이다
이런 서른 살의 세 친구가 겪는 이야기는 꿈꾸는 이상과 현실 속에서 타협해나가는 과정들을 보여주면서, 꽤나 논리적인 명분과 처세술로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낸다
뻔해 보일 수 있는 로맨스 드라마가 뻔하지 않은 건, 캐릭터들이 내뱉는 생각들이 꽤나 탄탄해서 일 거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하지도 않다. 코믹한 상황과 그때그때 적절한 고민에서 우러나는 진지한 고민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캐릭터들의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진주를 비롯한 주인공 3인방은 20대 시절의 험난한 연애 과정을 겪으면서 연애에 있어서도 나름 냉소주의자들이다. 드리마 작가인 진주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현실에선 이미 질려버린 사랑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대리 만족하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버텨나간다. 그녀에게 멜로드라마는 작가로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이자, 팍팍한 자신의 삶을 위로해 주는 친구 같은 존재이다
이번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발견한 배우가 한 명 있다면 응팔의 정봉이(배우 전재홍)가 아니었나 싶다
배우로서 나름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은 경력도 있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보인 그의 비주얼이나 캐릭터 연기는 색다른 매력이 잘 어필된 거 같다. 전재홍은 김범수 역의 스타 PD로 나온다. 방송사의 고공 시청률을 이끌어온 젊은 스타 PD로서, 자아도취와 자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다. 성공 방정식만 따라가려는 방송국 영감들과 달리 기존의 성공 조건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대본을 보고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일적으로는 굉장히 프로페셔널 한 인물이다. 이런 범수는 진주가 신인 작가로서 낸 공모전의 대본을 보고 가능성을 발견해서 진주의 작품을 가지고 드라마 제작을 하려고 한다. 진주가 자신의 대본에 대한 감독의 진의를 묻는 질문에 그가 남긴 대사가 참 멋지다. 택배 받는 것보다, 그리고 식당에서 메뉴판 고르는 것보다 이 일을 좋아한다니... 이거 무언가 큰 울림이 있는 비유다
인생에서 우선되는 가치에 대한 대사도 참 흥미롭다. 사람마다 자신이 느끼는 환경과 기억에 따라 우선순위가 다를 진데, 다큐멘터리 감독인 은정은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다 알게 돼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 홍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 알게 된다
드라마란 원래 잘 짜인 한 편의 픽션이지 않은가
그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 세상에 지친 나의 마음을 위로받고,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특히나 요즘 같이 막장 드라마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한 편의 웰메이드 드라마는 반복된 일상에 지친 나에게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멜로가 체질>은 단순히 젊은 남녀 캐릭터들의 사랑 타령에서만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서른으로 대표되는 청춘들의 고민과 그 고민에 대한 실용적인 처세가 담긴 것 같아 논리적으로 공감이 가는 작품이다. 물론, 본방 당시에는 예상보다 시청률이 저조했다고는 하나 종영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에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Top 10에 올라오며 마니아층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사랑과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이 여전히 많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인생에 절대적인 정답이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가 좋은 드라마를 보고, 좋은 고민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