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07]_미소하는 침묵

by 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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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었다. 혜화동 로터리의 가로수는 그때도 플라타너스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가로수 너머로 본 서양식 붉은 벽돌 건물의 중심은 혜화동 성당이었다. 그 옆의 동성학교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어서 얼핏 교도소처럼 보였다. 전학한 이후 2~3년 동안 거의 날마다 보면서도 훗날 내가 그 학교를 6년이나 다니게 될지는 상상도 안 해 봤다.

1966년 3월, 박희진 선생님은 교문에서 올려다보이는 완만한 언덕의 큰 나무 밑에 혼자 서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짧게 깎은 선생님은 낡은 홈스펀 상의를 걸쳤다. 훗날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담은 시집을 본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선생님의 첫 시집 ‘실내악(1960)’과 두 번째 시집 ‘청동시대(1965)’를 중학교 때 읽었다.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인 김형구 선생(1921-2015)도 동성학교의 미술 교사여서 외숙의 서재 겸 화실에서 그 시집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내 책꽂이로 자리를 옮겼을 '실내악'의 첫 페이지 왼쪽 귀퉁이에는 ‘김형구 선생 혜존’이라고 조그맣게 한문으로 쓴 단정한 펜글씨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이 시집에 실린 ‘디오게네스의 노래’를 특별히 좋아했다.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었으며 고등학교 때는 교실에서 급우들에게 들려준 일도 있다.

세 번째 시집 ‘미소하는 침묵(1970)’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앞 서점에서 샀다. 이 시집에 수록된 ‘효봉 대종사 송’이라는 장시에는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승려가 되었다는 효봉 스님 일대기가 나오는데, 나도 우선 엿장수부터 해 보고 싶어서 엿가위를 사 들고 가출했었다. 그때 곧장 범어사나 해인사 같은 큰 절을 찾아갔더라면 나는 승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다닐 때 처음으로 서울 동대문구 안암동의 선생님 아파트를 찾아갔다. 23년을 봉직한 동성학교에서 이미 퇴직한 후였다. 교직 생활 23년은 교원공제조합을 통해 퇴직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근무 연한을 훌쩍 넘어선 세월이라고 했다. 독신이라서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연금이 나오니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시를 쓰는 길이 열렸다.

거실 한쪽에는 불두(佛頭)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큰방에는 좌선하는 두툼한 방석이 따로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일과는 참선과 산책과 독서와 집필이었다. 선생님은 검소하고 단정한 수행자 같은 일과를 이어가면서 매월 한 번씩은 청중들 앞에서 자작시를 낭송했다.

구상, 성찬경 시인과 함께 시작한 시낭송회 모임의 초기부터 한동안은 나도 서울 비원 인근의 공간사랑에 찾아가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청중이었다. 나는 그 모임이 400회(2013년) 이상 지속되리라는 상상을 못 했다. 도중에 시 낭송 하는 자리를 대학로의 어느 카페 같은 곳으로 옮긴 일이 있었고, 그때는 나도 한두 번 낭송 시인으로 초대받아 참여했지만 뭔가 삐걱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사랑에서도 간혹 그랬지만 유독 우리 선생님만 청중들이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시를 그냥 멋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간혹 옆 사람과 소곤거리기며 한눈을 팔기도 하는 법인데 선생님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교사 생활의 습관이면서 시인의 자존심이기도 한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들도 없지 않았다.

선생님의 보문동 아파트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대학의 문예창작과 학생이었고, 무작정 시 쓰는 일에 빠져 있었다. 시 쓴 공책을 가지고 찾아갈 때마다 선생님은 집중해서 읽었고, 제법이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엉성한 부분을 아프게 지적하면서 언어와 형식에 대한 꾸준한 절차탁마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48회 동문 최동락 군의 출판사에서 펴낸 나의 시집 서문에서도 선생님은 그 점을 지적했다.

“즉, 그에겐, 수사학 면의 새로운 발명이나 남다른 수련에도 마음을 써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시란 새로운 언어 미의 획득인 것이다. 시어의 정련과 조직에 있어, 그가 좀 더 힘써주길 당부하며, 나는 이제 이 졸필을 놓겠다.”

훗날 나는 언어나 형식을 다듬기보다는 즉시 구체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단순한 방법을 찾고 있으며 언어 자체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 문제를 다루는 시에 끌린다고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선생님은 침통한 어조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짧게 당부했다.

그러나 내시는 온통 감상주의다. 네팔에서 9년을 살고 귀국한 직후에 낸 두 번째 시집을 선생님에게 드리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다. 선생님의 시론은 많은 시집에 그대로 드러나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언어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빠트릴 수는 없다.

나의 첫 시집에는 오자가 많았다. 교정을 본다고 봤는데도 오자가 너무나 많았다. 최동락 군은 나를 믿었고 나는 첫 시집을 내는 기쁨에 우쭐해서는 건성으로 읽었다. 선생님이 쓴 서문에서도 무려 12군데나 나왔다. 선생님은 오자를 일일이 수정하기를 원했다. 이미 나온 책이기에 정오표를 첨부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선생님에게는 안 통했다. 우리는 꼼짝없이 앉아서 식자 칼로 활자를 도려내어 오자 위에 붙여 나갔다. 5백 부나 되는 시집을 쌓아 놓고 페이지마다 일일이 오자를 고치는 일에는 선생님도 몸소 동참했다. 최동락 군과 나는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선생님의 말년이 점철된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나도 여러 해 동안 인근에서 살았다. 선생님은 승강기 없는 연립주택 꼭대기 층에 혼자 살면서 거의 날마다 북한산으로 산책하러 다녔다. 또한 산에서 내려오면 책상 앞에 열려 있는 창밖으로 산을 바라보다가 시를 썼다. ‘우이동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별명이 생겼던 그 무렵에 나온 시집이 ‘북한산 진달래’였는데, 그 시집의 초고가 들어 있는 대학 노트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진지하게 낭송하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 무렵 선생님 거실 소파에는 커다란 곰 인형이 앉아 있었다. 아무리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이지만 분위기를 좀 바꾸는 데 필요할 거라며 친지가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했다. 두 개의 방은 물론 거실과 현관 밖까지 쌓여 있는 서적 더미와 거실에 들어서자 보게 되는 커다란 불두로 인해 우이동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별명이 생겼겠지만 내 눈에는 소파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커다란 곰 인형이 오히려 생경했다.

우리는 진달래 능선을 걷고, 약수터 산책도 하고, 솔밭 근처의 막국수, 집에서 막국수도 먹고, 때로는 빈대떡에 막걸리도 마셨다. 우이동 시낭송회에도 몇 번, 소나무 연구회 모임에도 몇 번 같이 다녔다. 어느 날은 초대받아서 건너갔는데(아마 환갑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보성 학교 재학 시절 인연들이 오롯이 모여 있었다.

선생님의 동창생인 시인 성찬경, 소설가 서기원, 그리고 그들의 은사였던 철학자 김규영 선생이 모여 있었다. 김규영 선생은 시집 ‘실내악’의 속표지 다음 장에 새긴 <내게 처음으로/생에의 외경을 깨닫게 하신/ 김규영 스승께>라는 세 줄의 헌사의 주인공이었다. 김규영 선생은 1 백세가 멀지 않은 고령에 애제자 박희진의 부음을 듣고는 따님과 사위를 보내 문상하였다고 들었다.

우이동 시절에 이미 히말라야 오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에 빠져 있었던 나는 집에도 잘 없었다. 그러다가 아예 네팔로 이주하여 살 때에는 선생님이 최동락 군 등 몇몇 제자들과 함께 네팔 땅으로 찾아오는 일도 벌어졌다. 우리는 그때 네팔의 첫 국립공원인 랑탕히말 언저리를 닷새쯤 걸었다. 설산이 보이는 언덕에서 지팡이를 들고 내려오는 선생님의 모습은 이마와 얼굴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흰머리와 흰 수염으로 인하여 신선 같았다.

훗날 선생님이 보내준 시집에는 히말라야를 비롯한 네팔 여행에 관한 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시집은 다른 책이나 살림과 함께 카트만두의 내 거처에 그냥 두고 왔다. 금방 다시 갈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10년이 지난 이제는 네팔 땅을 다시 밟게 될지조차 알 수 없다.

귀국 후 10년은 번개 치듯 번쩍거리며 장마철 흙탕물처럼 흘러갔다. 나는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겨우 두 번 만났는데, 한 번은 인사동 길가에서 우연히, 나머지 한 번은 7-8년 전에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동성 가톨릭 동문 모임에 같이 초대되었을 때였다. 그곳에 갈 때는 내가 택시에 모시고 같이 갔는데 올 때는 모임의 요청으로 나만 남았다.

현관 열쇠를 노끈으로 묶어서 어깨에 메는 가방에 연결하고 다닐 정도로 이미 노쇠한 노인을 혼자 귀가하게 한 그 밤에 나는 동문 앞에서 히말라야에 관한 내 이야기를 떠들며 술을 받아 마셨다. 그날 이후로 선생님을 뵌 적이 없으며, 문상도 못 했고 장례나 사십구재에도 참석하지 않은 자로써 이런 글을 쓰는 일은 괴롭다.

백중이었던 엊그제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잠이 깼을 때 올해에는 유난히 많은 어른이 앞을 다투며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한 분은 나의 외숙 김형구 선생이다. 외숙은 나를 동성으로 이끌었고, 박희진 선생님의 첫 시집을 증정받아 서가에 소장했던 분이다. 이제 내 손에 있는 그 시집을 들추면서 선생님과 함께했던 세월을 더듬고 나니 슬프고 죄송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다. (2015년)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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