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08]_일찌감치 배제된 소년들

by 김홍성


.

그날은 무슨 잘못으로 교실에서 쫓겨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엉뚱한 질문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혜화 초등학교 때부터 교사에게 질문을 자주 해서 수업을 방해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질문할 때마다 미운털이 박혀서 벌도 서고 뺨도 맞았다. 반장이나 우등생들에게 눈총도 받았다. 그러나 질문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기에-어쩌면 그게 다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는 아예 교실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어떤 교사는 내가 질문이 있다는 표시로 손만 들어도 '너! 나가! 빨리 나가!'라고 소리 지르며 지우개를 던지기도 했다.


1969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날도 그 비슷한 일로 교실 밖으로 추방당했던 것 같다. 그때 이미 한두 번 추방당했던 게 아니었는지 익숙한 장소에 내가 있었다. 그곳은 우리 교실이 있는 신관 뒤편이었다. 괜히 운동장을 어슬렁거리거나, 강당 옆 매점 앞 같은 곳을 배회하다가 교사들을 만나면 최소한 꿀밤 한 대 정도는 각오해야 했기에 그날도 오줌 지린내가 나는 신관 뒤편 구석을 찾아갔던 것 같다. 그곳엔 신관을 지을 당시에 쓰고 남은 골재나 철근 등이 앉은키 높이로 방치되어 있었고, 교실 창문에서 내다봐도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기에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거기서는 소신학교(혜화동의 가톨릭 신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그 운동장에는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 학생들이 보였다. 혼자서 걷는 학생도 보였고, 짝을 지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학생들도 보였다. 우리처럼 목을 호크로 조이는 검정 교복을 입은 그 학생들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뭔지 모를 신비감마저 풍겼다.

미루나무였는지, 플라타너스였는지, 혹은 포플러였는지는 잊었지만, 푸른 잎사귀를 팔랑이는 키 큰 나무들이 넓은 운동장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무들 너머로는 낙산이 보였다. 소신학교 운동장에 비하면 우리 운동장은 무척 좁았고 병영의 연병장처럼 살벌한 곳이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학교 운동장이 얼룩덜룩한 군복 차림으로 목총을 들고 군사 교육 훈련(교련)을 받는 장소이며 군화를 신은 교관에게 발길질당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딴 세상에 사는 듯한 소신학교 학생들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떤 돌멩이 하나가 그들의 운동장을 향해 날아간다는 걸 알았다. 그 돌멩이는 내 머리 뒤에서 날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누가 던지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Y였다. Y는 골재 더미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은 자세로 또 하나의 돌멩이를 들어 소신학교 운동장으로 쏘아 올린 후 나를 보고 씩 웃었다. Y가 쏘아 올린 돌멩이는 소신학교 운동장 가녘에 떨어졌을망정 그쪽 학생들을 다치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그쪽 학생들을 맞출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Y는 무슨 이유로 거기 나와서 앉아 있었는지도 잊었다. 그러나 나처럼 쫓겨난 것이 아니라, 제 맘대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왔을 수도 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부모가 모두 대학교수라는 그도 나처럼 문제아이긴 했지만 나와는 종류가 달랐다. 그는 학교에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으나 가끔 무서운 분노를 터트리며 교사들에게 대들고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곤 했다. 중학교 때였을 거다. 혜화동 로터리 쪽의 아래 운동장에서 K가 여러 아이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Y가 나타나 K를 도와 싸우는 광경을 봤는데, 소년들의 싸움치고는 아주 거칠고 잔인한 싸움이었다고 기억한다.


뜸 들이기에 뭣해서 미리 말해 두지만, Y는 훗날 군 생활 중에 군 교도소에서 형을 살았으며, 형기를 마치고 전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Y를 마지막으로 본 때는 내가 군에서 제대할 무렵이었다. 장소는 Y네 집 근처인 돈암동 길거리였다. 나는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를 위해 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Y는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서 보도를 걷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열고 ‘Y야!’ 하고 부르니 Y는 강아지를 안고 뛰어오면서 나더러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내가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Y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서 그날 중에 귀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 두려웠던 나는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 질렀다. 곧 제대하니까 제대하고 만나자고. Y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이미 많이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Y가 일을 저지르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제대하고 나서 들었다. 얼마 후 꿈에 Y를 보았다. 나는 어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누군가가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나를 향해 뭔가를 던졌다. 얼결에 받아 보니 봉제로 만든 곰 인형 같은 것인데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툭툭 치기에 돌아보니 Y가 씩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1969년 신관 뒤편 골재 더미 위에 앉아서 돌멩이를 날리고서 나를 보며 웃던 그 웃음이었다.


Y와 나는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Y와의 그 짧은 만남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한다. 교실에서 추방당한 음울한 소년들이 우연히 만난 학교 교육의 사각지대, 그 지린내 나는 그늘 속에서 소외감으로 눈물이 났던 때도 있다.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본 낙산 기슭의 소신학교 운동장은 빛에 쌓여 있는 듯했다. 줄지어 선 푸른 나무들 밑으로 우리 또래의 소년들이 천천히 걷는 모습은 다른 세계의 풍경인 듯했다.


2008년에 네팔의 관광 휴양지 포카라의 가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가톨릭 신부는 바로 그 학교 출신이었다. 신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그렇게 운동장을 걷는 일은 묵상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천주교 가정에서 특별히 뽑혀온 학생들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신부는 소신학교에서 혜화동 성당 쪽으로 나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눈물 고개’라고 불렀던 사연을 말해 주기도 했다. 소신학교는 규율이 엄했다. 장차 신부가 될 학생들이어서 사소한 잘못으로도 퇴교를 당했다. 눈물 고개는 바로 그 퇴교당한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넘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같이 입학한 학생 중에서 반 정도가 눈물 고개를 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1]_[07]_미소하는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