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을 낳아서 셋을 산에다 버리고

by 김홍성

.

.
겨울이지만 남쪽 바다 섬마을은 이른 봄 같다. 산비탈의 파릇파릇한 보리밭이며 돌담에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햇살로 인해서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앉으면 금방 졸음이 올 듯하다. 그런데 그 졸음을 한꺼번에 쫓아내는 폭발음이 마을 한구석에서 터졌다. 이어서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들뜬 함성. 펑수 영감이 온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손의봉(60세_화정면 화백리 127번지) 씨가 같은 섬의 이웃 마을인 신기촌으로 넘어와 펑튀기를 터트린 것이다.

방학 숙제는 벌써 끝냈고, 어른들 일손을 도울 일도 없는 농한기라서 노상 심심한 섬 아이들에겐 펑수 영감이 산타클로스보다 반갑다. 산타클로스는 야밤에 굴뚝을 타고 온다지만 펑수 영감은 조그만 목선을 타고 온다. 바람이 자는 날, 햇살도 부드러운 어느 날 문득 펑수 영감은 아내 고양엽(54세) 씨와 함께 조그만 목선으로 쪽빛 바다를 건너오는 것이다.

펑수 영감이 펑튀기 기계와 그 부속 도구들을 지게에 지고 섬에 상륙하는 모습은 안소니 퀸인가 하는 서양 배우도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젊은 시절에 그가 그가 극복한 역경과 파란이 절어있는 굵직한 뼈대, 그 뼈대 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걸걸한 웃음소리를 누가 흉내 낼 수 있으랴.

펑수 영감이 왔다는 기쁜 소문을 듣고 돌담길 사이로 줄달음쳐 나오는 어린이들을 향해 던지는 펑수 영감의 인사는 언제나,
“아, 그래, 잘들 있었남?”이 한 마디면 족하다.

펑수 영감이 동네 마당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소쿠리나 양재기 정부미 포대 등에 펑 튀길 것들과 연료로 쓸 장작 몇 개비씩을 들고 줄지어 오고 있다. 섬에서 가장 흔한 곡물은 보리와 옥수수라서 주로 그것들을 튀기지만 누룽지도 있고 묵은 가래떡이나 인절미, 콩, 조, 더러는 쌀도 튀긴다.

펑 튀길 차례대로 마당에 줄지어 늘어놓은 것들은 TV에서 선전하는 과자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또 그것들을 튀기기 위해 오종오종 모여든 섬 어린이와 부인들의 모습은 또 얼마나 가난해 보이는가. 그러나 펑튀기가 터지는 그 순간만은 어떤 축제보다도 풍성하고 가슴 뛰는 환희의 순간이 된다.

축포가 터지고, 달큼한 연기가 뭉클 솟아나고, 땅바닥에서 주운 강냉이의 고소한 맛이란 이 한갓진 섬에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한 되가 한 말로 불어나는 강냉이를 한 굴 튀기는 삯은 3백50원. 도회지에서는 좌석버스 요금에 지나지 않지만 그나마 그 돈도 없어서 외상 펑튀기를 하는 부인도 더러 있었다.

“오죽하면 이걸 다 외상 하겠남. 나중에 만나도 외상값 깨우쳐 본 적은 없지라.”
약주가 거나해진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말이 없다는 손 씨의 얘기다. 손 씨에게도 3백50원은 적은 돈이 아니지만 그런 인정 때문에 이 섬 저 섬 찾아다니며 펑튀기를 해 온 지난 30년 가까이 별반 괄시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 부인 고 씨의 얘기다.

한 번 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10분. 하루 8시간을 일해야 마흔여덟 번 펑을 하니까 하루 수입을 어림잡아 보면 1만 5천 원 정도다. 그러나 매일 그만한 벌이를 하는 건 아니다. 여름철 빼고, 농사철 빼고, 풍랑에 발이 묶이는 때 빼고, 배가 없어서 남의 동네에서 그저 쉬는 때 빼고 나면 큰 벌이는 못 된다.

“내 땅이라고는 한 뙈기도 없으니 이걸 허요. 벌이는 벌이니까. 그래도 이것 갖고 7남매 키웠단 말이시.”
오른손으로는 연신 펑기계를 돌리고 왼손으로는 아내가 도끼로 불쏘시개만큼 잘게 쪼개 놓은 장작을 풍로에 집어넣으며 손 씨는 이런 말도 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래도 내 배라고 작은 놈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시, 베라호 태풍인지 베라 먹을 태풍인지 그때 깨져서 못 쓰게 돼불었소. 그것 없어 노니까 내 맘대로 못 댕기요. 그렁깨 비용도 더 들고, 되게 불편해요.”

태풍 사라호 때 모아서 태풍 베라호 때 깨진 그 배는 이 부부가 펑 기계를 싣고 드러누우면 꽉 찰만큼 작고 낡은 목선. 그러나 그 배를 타고 손 씨 부부는 멀리 고흥 반도 끝에 있는 소록도 앞바다까지 다녔다 한다.

손 씨가 펑수 영감으로 나선 것은 약 30년 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11세부터 남의 집 고공살이(머슴살이)를 시작해서 18세 때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손 씨는 육이오 동란 직전에 부인 고 씨와 결혼했다 한다.

부인 고 씨 역시 손 씨 못지않게 가난한 집안의 3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소녀적부터 남의 집 고공살이를 했다 한다. 집도 땅도 없는 이들 부부는 결혼을 하고서도 각각 남의 집 고공살이를 했다 한다. 전쟁이 터지고 손 씨가 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고 씨는 손 씨가 군에 있는 8년 동안 줄곧 혼자서 시집살이를 했다.

손 씨는 건설공병단에서 이등 상사로 제대한 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고깃배 한 척을 장만하고 그것으로 고기잡이를 다녔으나 빚만 잔뜩 지게 되어 부부가 함께 펑튀기를 시작했다.

“그때 진 빚이 20만 원 인디, 그걸 갚을 길이 까마득한 허요. 낙심하고 있는디 여수에서 어떤 펑튀기 장수를 만났소. 그 사람 말이, 여수서 강원도까지 여섯 달 걸려서 펑튀기 다니기를 세 번 하니깨 집 한 간 장만할 수 있었다 안 허요. 그 말 듣고 나도 펑튀기로 나섰오.”

손 씨는 맨 처음 펑튀기를 나서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섬사람들이 워낙 순박해서 펑튀기를 자기 집 마당에서 터트리는 것이 무당 푸닥거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에 서로 앞을 다투어 자기네 마당에서 펑튀기를 하라고 잡아끌었다고 한다. 섬사람들은 ‘펑’ 하는 그 놀라운 소리에 집안의 잡귀가 모조리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받아 줄 뿐 아니라 밥도 거저 주고, 잠도 거저 재워 주는 등 귀빈으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펑 소리가 무슨 폭발물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 경찰관들이 출동하는 일이 잦아지자, 한때는 섬에서 펑튀기를 금지당한 일도 있었다 한다. 당시 펑튀기 삯은 20원. 불면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일 원짜리 동전 스무 닢을 손에 받아 들 때마다 손 씨는 ‘이것을 모아 언제 20만 원을 만드나’하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금년 초에도 손 씨 부부는 2주일에 걸친 펑튀기 유랑을 했다. 객선으로 하화도에 갔으나 다음날 폭풍주의보로 발이 묶여 동서 임송택(67세) 씨 집에서 사흘을 묵고, 나흘째 되는 날 친구의 고깃배로 상화도로 건너가 펑을 튀기며 매제 김영채(54세) 씨 댁에서 이틀을 묵고, 다음날 여객선으로 귀가하려 했는데 또 폭풍주의보가 내려 여객선이 출항하지 않아 상화도 주민들과 함께 1인당 1천 원씩에 배를 전세 내서 육지인 화양면 닭머리로 건너가 그곳 친척인 김종권(51세) 씨 집에서 1박 한 뒤 펑기계는 그 집에 맡겨두고, 다음날 귀가하여 하루 자고는 이튿날 날 새기 무섭게 동네 고깃배로 다시 닭머리로 건너가 펑기계를 리어카에 싣고 엿새 동안 육지 마을을 다니며 펑을 튀겼다 한다.

육지 마을에서의 처음 사흘간은 화양면 세포리의 친형님인 손귀봉(65세) 씨 댁에서 묵고, 다음날은 화양면 장등리의 처고숙 김찬동(70세) 씨 댁에서 묵고, 마지막 날은 다시 세포리 형님 댁에서 묵었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때는 그리 많지 않고 대개는 이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고 한다. 집을 지키는 두 아들이 ‘중3, 국 6’이어서 밥을 제때 먹는지, 군불은 때고 자는지, 또 소여물은 제대로 주는지 근심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초에 두 주일 동안 단 하룻밤만 집에 들러보았을 뿐 내내 펑튀기를 하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출가한 둘째 딸이 집에 다니러 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잠은 대부분 친척 집에서 자고, 끼니는 펑튀기를 하는 동안 동네 부인들이 펑삯 대신 가져오는 음식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따로 숙식비가 들지는 않지만, 저녁이면 친척 집 사랑방에 모인 친지들에게 술을 내는 것이 보통이기에 비용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술잔을 주고받는 일이야말로 유일한 낙인만큼 그 술값 몇 푼은 아깝지 않다는 손 씨다.

손 씨 내외는 집에서도 한가한 사람들은 못 된다. 이제 곧 봄이 되면 펑을 쉬고 농사일을 해야 한다. 손 씨 소유의 땅은 텃밭밖에 없지만, 남의 논밭을 부치기 때문에 논갈이를 하고, 못자리를 만들고, 보리를 베어 타작해야 한다. 6월이면 고구마를 심고, 여름에는 고기잡이를 따라나서는 틈틈이 김매기를 하며 옥수수를 따다가 말려야 한다.

볕이 식는 9월부터는 또 잠시 펑튀기를 다니지만, 10월 고구마 캘 철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어 숨 돌릴 사이 없이 벼를 베어 타작하고 보리를 심고 하다 보면 어느새 11월, 이때부터 구정까지가 펑튀기 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폭풍주의보가 잦은 것이 탈이다.

이처럼 고되고 바쁜 중에도 손 씨 부부는 7남매를 키웠다.
“이젠 밑으로 두 애기도 다 커서 저희들끼리 밥을 해 먹으니까 다행이지러. 그전에는 우리가 집을 비우면 애기들이 그냥 굶고서 학교 다니다 교실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단 말이시.”
고 씨의 얘기. 시종 웃으면서 하던 얘기 끝에 고 씨는 괜히 손등으로 눈을 비빈다. 고 씨는 남편 손 씨 앞에서는 별반 말이 없는 편이다. ‘펑 튀러 다니느라 고생한 얘기 좀 해달라’고 청해도 한참 머뭇거리다가, “저야 뭐 하는 일이 있어야 말이지요. 저 양반이 ‘이고 가세’ 하면 이고 가고, ‘내리세’ 하면 내리고, ‘잡아 주소’하면 잡아주고 그라지, 암 것도 모르요.” 했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남편 손 씨의 성미가 워낙 불같아서 어쩌다 한마디 아는 체를 할 때마다 손 씨가 벼락같은 고함을 치는 통에 젊어서부터 노상 함구하고 살아온 눈치다. 그런 고 씨지만 자식 키우는 얘기가 나오자,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열을 낳아서 셋을 산에다 버리고 일곱을 키웠소. 낳을 때마다 젖이 안 나와 생쌀을 씹어서 암죽을 쒀 먹여 길렀지라. 쌀이나 제대로 있어야 말이시. 쌀 한 되 팔아서 비료 종이에 싸놨다가 애기 낳고 한 끼니 해 먹고는 그만이지요. 다음날부터는 보쌀(보리)을 절구에 쪄서 먹어야 했응께 노상 가래톳이 서고 ...”

손 씨의 자녀들은 현재 맨 아래 두 형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객지에 나가 있다. 장녀(30세)는 서울에서 전기 상회를 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차녀(28세)는 광양제철소의 용접기사와 결혼해서 현재 광양에 살고 있고, 장남(25세)은 현재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차남(22세)은 군복무 중이다. 그리고 3녀(20세)는 현재 서울 어느 봉제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한다.

막소주 몇 잔 탓일까, 눈가장자리가 불그스레해진 손 씨는 청자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도록 아무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우리 늙은이들이야 이제 죽어도 한 될 것 없지라. 위로 다섯은 다 컸으니께 됐고, 이제 저것들 고등학교까지 가르칠 일이 제일 큰 걱정이란 말이시.”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손 씨가 자기들 말을 하는 이 대목에서 여태껏 방에 있던 형제는 쑥스러운 듯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방문이 열리자 갑자기 크게 들리는 바람 소리. 폭풍주의보가 내렸다더니 역시 바람이 드세다. 손 씨가 밖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간 김에 도끼 가지고 선창에 가서 우리 배 그거 좀 뜯어오거라. 군불 때그로.”
손 씨가 말한 ‘우리 배’란 바로 지난해 베라호 태풍 때 깨졌다는 목선을 말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지난 30년 동안 손 씨 부부를 태우고 다닌 목선은 죽어서 땔감을 남겼다.(1987년)






월요일 연재
이전 08화[1]_[08]_일찌감치 배제된 소년들